"한국 작가 전시가 정말 많이 열리고 있어요. 어디 구석에서 열리는 초라한 전시들이 아니죠. 무척 다양한 전시들이라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만난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58) 전 국립현대미술관(국현) 관장의 말이다. 2015~2018년 국현 관장을 지낸 그는 한국 작가들의 전시를 둘러본 뒤 세계 무대에서 한국 미술의 위치에 대해 애정 담긴 평가를 내놨다.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그는 한국 추상미술 1세대 작가 이성자의 회고전 '지구 저편으로'를 기획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다.
"이성자는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야말로 이성자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최고의 플랫폼이라 생각했어요."
이성자(1918~2009)는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 1세대로 꼽히는 작가 중 유일한 여성이다. 한국전쟁 중에 이혼으로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고 혈혈단신 프랑스 파리로 떠난 그는 30대 중반 늦깎이로 미술을 배워 60년간 화업에 매진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예술적 고향인 프랑스가 아닌 해외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이다.
마리 관장 시절 국현은 과천관에서 이성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대규모 회고전이었던 만큼 마리 전 관장은 이성자의 거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며 지식을 쌓았다. 미술계는 여성 작가를 배제하거나 저평가해왔다. 마리 전 관장은 이성자의 여성 개척자 역할에 주목했다. 그는 세계 미술계가 이성자를 제대로 발견할 때 한국 근현대미술사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회화 20점은 1950년대에 그린 이성자의 초기작부터 작고 직전까지 작업한 '우주' 연작(1995~2008) 등을 망라한다. 이성자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핵심 작품들이다. 마리 전 관장은 이성자의 세계관인 '어머니로서의 대지' 개념에 방점을 찍었다. 이성자는 '여성과 대지'(1961~1968) 연작으로 프랑스 파리 화단에서 호평을 받았고, 1970년대까지 지구, 생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모티브 삼아 창작했다.
"지구, 자연 생태, 공생 등 (기후위기와 관련한) 주제는 최근 20년 동안 미술계의 핫 이슈입니다. 그 메시지를 이성자는 1960년대부터 던졌죠. 당시엔 (기후위기라는) 단어가 없었는데도요. 이성자는 생태계 내 인간 존재에 대한 지각을 먼저 한 선구자입니다."
이성자의 삶이 올해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인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와도 맞닿아 있다고 마리 전 관장은 평했다. 한국을 떠난 이후 이성자는 외국인 유목민처럼 살면서도 한국인의 정신을 계속 녹였다는 점에서다. "이번 비엔날레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느냐보다는 어디로 갈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성자의 작품을 보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느 것 하나에 굳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 여행하며 구축해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최고 권위의 미술 기관인 국현의 수장이었던 만큼 마리 전 관장은 한국 미술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았다. 베네치아 일대 곳곳에선 한국 관련 전시가 열리고 있다. 공식 병행전시 중 하나인 '유영국:무한세계로의 여정',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한국관 30주년 특별전' 등 대부분 전시를 관람했다는 그는 "한국을 떠난 5년 동안 세계 미술 무대에서 한국의 위치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했다.
"제가 한국 작가에 대해 잘 모르는 유럽인 큐레이터로서 베네치아에 도착했다면, 여기저기서 한국 미술 전시가 열리는 현상을 무척 흥미롭게 봤을 겁니다. 한국 미술에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다만 미술 비평이나 출판, 연구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비엔날레가 열리는) 2년에 한 번으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국 미술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