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을 운영 중인 6개 지역 거점 국립대 총장들이 "2025학년도 대학입학전형에서 증원된 의대 정원의 50~100% 범위에서 신입생을 자율적으로 모집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사실상 정부가 2,000명으로 정한 내년도 의대 신입생 증원 규모를 줄여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간 의대 증원 정책의 우군이었던 대학 총장들이 정원 조정을 요구하면서 교착 상태인 의정 갈등 국면에 돌파구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강원대 김헌영·경북대 홍원화·경상국립대 권순기·충남대 김정겸·충북대 고창섭·제주대 김일환 총장은 18일 공동으로 낸 대정부 건의문에서 "교원과 시설, 기자재 등 대학별 인적·물적 자원 확보 상황이 상이하다"며 이같이 요청했다. 이들은 각 대학이 내년도 입시전형 시행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 시한이 이달 말인 만큼 정부가 조속히 결단을 내려 자율 모집에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고 건의했다. 김헌영 강원대 총장은 한국일보 통화에서 "입시 문제는 의정 갈등 문제와 분리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내년도 의대 모집 정원에 한해 정부에 제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달 의대 증원분 2,000명을 전국 40개 의대 중 서울권을 제외한 비수도권·경인권 32개교에 배분하면서 이들 6개교에는 총 598명을 늘려줬다. 강원대 83명, 경북대 90명, 경상국립대 124명, 충남대 90명, 충북대 151명, 제주대 60명이다. 특히 충북대는 현재 49명인 의대 정원이 200명으로 4배 넘게 늘어나 최대 증원율을 기록했다.
이들 대학 모두가 늘어난 정원의 50%(299명)만 모집하게 된다면, 내년도 전체 의대 신입생은 많아야 1,701명 늘어나는 데 그친다. 정부가 상정한 2,000명 증원의 85% 수준이다. 정부가 이번 건의를 수용하고 다른 의대들도 신입생 선발 인원을 조정한다면 의대 증원 규모가 더 줄어들 수도 있다.
총장들은 또 "학교의 노력에도 복귀하지 않는 의대생이 상당수에 이르는 초유의 사태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며 "정부는 학생들이 빨리 배움의 공간으로 돌아와 학습권을 보장받고 교육현장 갈등이 더는 심화하지 않도록 학생 보호를 위해 책임을 다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의대 증원 이후 교육 여건이 악화하지 않도록 재정 지원과 함께 의대교육 선진화와 고등교육 미래를 위해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달라"고 촉구했다.
정부와 의사들이 의대 증원을 두고 극한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이번 건의는 의대 운영 대학들이 일종의 중재안을 내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간 이들 대학은 의대 정원을 늘려줄 것을 적극 요청하면서 정부 정책에 힘을 실어왔다. 하지만 이달 말까지 의대 증원을 반영해 대입 전형 계획을 변경하고 다음 달 말까지 확정안을 수험생에게 공표해야 하는 촉박한 상황에서, 정부가 좀처럼 의료계와 타협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총선 직전엔 증원 규모 조정 가능성을 시사해 입시 일정에 혼란이 가중되자 국립대 총장들이 총대를 멘 것으로 보인다.
총장들이 학내 분란 수습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의료계 집단행동이 두 달째 이어지면서 수업 거부 의대생들의 집단 유급 우려, 전공의 이탈에 따른 대학병원 진료 파행 등으로 학사 운영에 고충이 큰 상황이다. 또 의대 증원 신청 및 배정 과정에서 대학본부와 의대 간 갈등이 깊어진 상황에서, 의대생과 의대 교수들이 총장에게 사태 해결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전날 의대생들은 의대 증원분을 대입 전형 시행계획에 반영하지 말라며 오는 22일 총장들을 상대로 가처분 신청을 내겠다고 예고했고,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도 대학 총장들에게 "교육자로서 본분을 생각해 무리한 의대 증원을 거둬달라"며 공개 서한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