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忠淸道)는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청충도’가 되지 않은 것은 인구 규모나 지정학적 측면에서 충주가 청주보다 과거에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충주는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인구는 줄고, 반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아 2년 전 소멸 위험지역으로 분류됐다. 충주 사람들은 쇼핑을 하러 서울과 경기도로 가고, 아직도 관내 학교들은 학생들을 서울로 못 밀어 올려 안달인 탓이다. 요즘 여느 지방 중소 도시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지만, 충청감영이 자리했던, 한때 전국 3위 도시의 위상은 온데간데없다. ‘충청도 대표 도시’는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쇠락했을까. 산업화 시기 각종 개발계획에서 충주가 제외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충청권 안에서도 유독 심한 지역의 폐쇄성과 배타성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충청 보수의 중심 충주...유난한 배타성
충주의 각종 매장에서 일을 하다 영상제작사를 차린 충주 토박이 공영환(38)씨 생각도 비슷하다. 그는 “말할 때도 명쾌하게 하지 않고, 웬만해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게 충청도 사람 특징인데 그 특징이 충주 사람에게서 더 두드러진다는 걸 체감한다”고 말했다. 공씨는 그 이유로 “삼국시대 때 각 나라가 돌아가면서 지배한 지역”이라는 점을 꼽았다. 충주가 철의 산지였고, 한강과 낙동강 사이의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점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돌아가면서 차지했지만, 역설적으로 잦은 손 바뀜에서 비롯된 지역민들의 생존 본능, ‘경계 DNA’가 충주 사람들의 심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충주 구도심 재생사업 실무 담당자인 정진교 충주시 균형개발과 주무관도 “부임해 민원인들을 상대로 일을 보는데 ‘너 어디에서 왔냐? 못 보던 얼굴인데’가 첫인사였다"며 유난한 배타성을 돌아봤다. “같은 충청도 사람들도 느낄 정도의 보수성, 배타성”(청주시민 한모씨) 탓인지, 지방의 여느 중소 도시처럼 청년과 돈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간 탓인지 지난 12일 찾은 성서동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한산했다. 점심시간인데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고 어떤 골목에선 한 집 건너 한 집이 비어 있었다. 성서동 상인회장을 지낸 이재갑(64)씨는 “건물주들이 세상 바뀐 줄 모르고, 전성기 때만 생각하고 집세를 안 내리니 공실밖에 더 나겠냐”고 반문했다. 비어 있는 30㎡짜리 점포 중개에 나선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임대료를 25%나 내려도 관심 보이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높은 콧대... 외면받는 구도심 중심상가
성서동은 충주의 중심 상권으로 영화관, 카페, 패션, 식당, 문구점 등 각종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15년 전 1층 매장은 한 칸(약 20평)에 월세 200만~300만 원의 '미친 시세'였는데 코로나19를 지나면서도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건물주들이 높은 월세를 내리지 않아 코로나 직전에도 공실률이 27%나 됐다.
외지에서 온 청년들은 진작에 비어 있는 이 점포들을 주목했다. 필요 이상으로 큰 게 문제였다. 남편을 따라 15년 전 서울에서 충주로 이주한 박진영(44) 보탬플러스협동조합 대표는 “2018년쯤 공간이 너무 크고 비싸다. 쪼개서 임대를 놓으시면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건물주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충주시도 공실을 그대로 방치하면 상권 전체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고, 건물주 120명에게 특별 편지를 쓰기도 했다. 도시재생사업을 소개하면서 ‘임대료를 인하해 청년이 입주해 창업하면 1,500만 원의 리모델링비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 주무관은 “정말, 단 한 분도 답을 안 했다”고 설명했다. 그사이 작년 말에는 충주역과 판교역을 잇는 직통 열차도 개통돼 돈과 사람의 수도권으로의 유출은 가속화됐다. 젊은이들은 차로 1시간이면 닿는 경기 이천 등지의 쇼핑몰로 가서 돈을 쓰는 바람에 성서동은 희망이라곤 기대하기 어려운 동네가 됐다.
건너편 골목, 성내동서 시작된 변화
이곳에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움튼 건 4년 전이다. 월세 200만 원짜리 점포 하나가 45만 원에 계약이 체결된 것. 이곳에서 샐러드 가게를 차린 윤인선(36)씨는 “조사를 해보니 하루에 10만 원 매출도 못 올리는 가게들이 수두룩했는데, 30만 원을 내고 장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며 “건물 주인과 이야기가 잘 통한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편의점이 문을 닫은 뒤 5년 동안 비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가게를 열면 같은 건물에 비어 있는 다른 점포에도 장사를 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 한 청년의 설득이 주효했다.
건물주 김유숙(82)씨는 “비워놓느니 싸게라도 내놓자는 생각에 계약했지만, 맞은편 성내동의 다 쓰러져 가던 집들을 외지에서 온 청년들이 아기자기하게 고쳐서 활기를 불어넣는 모습을 보곤 청년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 청년 세입자 덕분에 비어 있던 점포에도 사람이 들어왔다”며 웃었다.
실제 변할 줄 모르던 충주 사람들을 바꾸기 시작한 건 충주 밖에서 온 청년들이었다. 서울에서 도시재생 컨설턴트와 구두 디자이너로 일하던 이상창ㆍ이세은(41)씨가 은행 대출을 끼고 7,000만 원에 성내동 관아길의 구옥을 매입, 2017년에 차린 ‘세상상회’가 대표적이다. 이세은씨는 “배타적 느낌을 전혀 안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건물에 들어와서 보란 듯 일궈내니 충주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지역 청년들이 만든 물건을 파는 편집숍을 겸한 세상상회를 거쳐 간 아르바이트생은 모두 14명. 그중 4명이 여전히 근무하고 있고 6명은 독립해 비슷한 사업을 차리는 등 이곳은 현재 충주 구도심의 활력 엔진 기능을 한다.
구도심 활성화를 지원하는 조은영 행정안전부 지역경제과 사무관은 “수도권 청년들이 지방에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지역의 배타성 때문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데, 관아골(성내동, 성서동)의 경우 여러 지역에서 온 청년들이 세상상회를 중심으로 지역 정보를 얻는다”며 “또 이들이 지역 청년커뮤니티에 녹아들면서 정착해 지역에 생기가 돌게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관아골과 같은 지역성장·발전모델에 주목하고 있다.
구도심 발전... 충주 사람들에게 넘어간 '공'
과거엔 관청에 일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 찾던 관아길에 창작자 마인드를 갖춘, 전국의 청년 크리에이터들이 공간을 열고, 또 그곳으로 타지의 청년들이 모이면서 관아골로 통칭되는 구도심의 소멸 징후도 조금씩 옅어지는 분위기다. 마음에 맞는, 비슷한 업종의 청년들이 모여 만든 각종 커뮤니티와 그들을 한데 묶어 관아골에 활력을 불어넣는 보탬플러스협동조합이 도시재생, 로컬 관광, 로컬크리에이터 양성 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 중이다. 현재 관아골에서 긴밀하게 엮여 활동하는 청년의 수만 40여 명에 이른다.
또 세상상회를 중심으로 한 성내동 관아골의 활기가 길 맞은편 성서동과 또 충주천변으로 확산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장면이다. 충주천변에 자신의 작업실을 겸한 ‘로컬종합상가 복작’을 연 화가 유순상(42)씨는 “관아골의 가치를 뒤늦게 알아차린 토박이들도 이제는 이 지역에 들어와 자신만의 창작과 사업을 하고 있다”며 “각 부처의 지역 활성화 사업과 외지에서 온 청년들이 그 마중물이 됐다”고 평가했다.
충주시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는 ‘대한민국 문화도시’ 사업 대상에 선정됐는데, 이 사업을 하면서 내건 캐치프레이즈, ‘충주 살면, 충주 사람’이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샀다. 그러나 이는 그만큼 이 지역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여기에 살아도, 딴 데서 왔다면 이곳 사람 아니다’라는 지역의 분위기가 강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정경모(67) 성내어울림시장 상인회장은 “관아골에 온 외지 청년들이 한 일을 시장 상인들이 모두 봤고,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그런 청년들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높은 임대료, 공실 문제 해결을 비롯해 지금까지 충주 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일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