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나 세계미술사에 나 자신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조각가 김윤신(89)은 새로운 꿈을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사전에 '끝'이나 '마무리' 같은 것은 없다는 듯 계속해서 '다음'을 이야기했다. 그는 구순을 앞둔 올해 모든 세계 미술인이 꿈꾸는 무대인 베니스(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처음으로 초청받았다. 비엔날레 사전 공개 행사가 열린 1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그런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것(베니스 비엔날레)은 잘 몰랐다." 비엔날레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면 김 작가는 이렇게 답하고는 한다. 유명함을 좇기보다 나무와 돌을 깎는 조각 행위에 헌신한 작가답다. 1984년 아르헨티나 이주 후 40년 가까이 한국에서 가까웠던 그의 이름이 주목받은 계기는 지난해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 이후 리만머핀·국제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최전성기를 열었다.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이번 비엔날레 총감독이 그 전시를 봤나봐요. 작품 8점의 사진을 콕 집어 초청했어요. 지난해 5월에 메일을 보냈다는데 소식이 없어서 저를 수소문했대요. 7월 말에 아르헨티나에 있는 김윤신미술관으로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왔어요. 처음엔 누가 장난하나 싶었죠."
김 작가의 작품은 비엔날레가 폐막하는 올해 11월까지 비엔날레 전시장(센트럴 파빌리온)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1979~1986년에 제작된 한국의 소나무와 호두나무 조각, 아르헨티나의 파라이소 나무 조각 4점과 1991년부터 2002년까지의 오닉스(줄마노) 조각 4점이다.
작품 제목은 모두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다. 음양처럼 서로 대립하는 것이 합쳐지고 나눠지면서 우주의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양상을 조형적 요소로 나타낸다. "나의 주제인 합(合)과 분(分)은 동양철학의 근본이에요. 두 개체가 합쳐져 하나가 되려면 정신과 노력을 더해야 하죠. 새로운 것이 탄생했다는 건, 벌써 또 나누어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나눔이 없으면 이 우주는 존재하지 못해요. 탄생하고 나누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 거죠."
'1935년 북한 원산 (출생),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한국 (강원) 양구 거주.'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주제를 내걸고 올해 비엔날레가 이방인과 이민자들에 집중해서일까. 김 작가를 소개한 전시장 안내판 끄트머리에는 작은 글씨로 이 같은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다. 페드로사 감독이 자신을 초청한 이유를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자신이 걸어온 삶 자체가 이 주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김 작가는 짐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은 북한인 곳에서 태어났지만, 해방 후 어머니와 단둘이 남한으로 향했어요. 전쟁 뒤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죠. 그러다 아르헨티나로 떠났고요.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 내 나라처럼 생각하고 작업했어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추구해 왔지만, 요즘은 부쩍 '정착'을 떠올린다고 한다. 부르는 곳이 많아지다 보니 작업할 시간이 통 모자라서다. 최근에는 아르헨티나 집의 짐을 한국으로 부치는 결단을 내렸다. 당분간은 한국에서 지내고 겨울은 아르헨티나에서 보내기로 했다. 절반의 정착인 셈이다.
"내가 보기에 예술에는 답이 없어요. 자기 몸의 느낌과 감각이 한꺼번에 표현되는 이 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이에요."
전기톱으로 나무를 베고 끌로 조각하는 김 작가의 비법은 '느낌'이다. '어떻게 하겠다'라는 구상 없이 어떤 느낌이 왔을 때 시작을 하고, '손을 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작업을 끝낸다. 그렇게 나무의 속살과 껍질이 공존하는 김윤신 특유의 목조각이 탄생한다. 돌을 조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호흡'이라는 하나의 느낌에 의존한다. 온몸을 재료와 도구에 맡겨야만 하는 고행이라 체력 소진이 만만치 않다. 이렇게 잘라낸 석면에는 돌이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무늬가 한줄 한줄 선명하게 살아있다.
구순의 '라이징 스타'가 된 김윤신의 다음 목표는 무얼까. 그는 최근 선보이는 '회화 조각'을 미술사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회화 조각은 나무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작업으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외출이 금지된 시기에 나무조각을 이어 붙여 그림을 그리면서 고안해낸 작품이자 하나의 장르다. "내가 유명해지고 작품이 뭐 어떻게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 예술 세계를 분명한 하나의 형식으로 내놓고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는 목적 하나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