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지운 문학이 포르노로 읽히고 말 때...뒤라스의 '연인'

입력
2024.04.19 11:00
25면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배수아 소설가·번역가 첫 연재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이번 주 연재를 시작하는 배수아 작가의 첫 글입니다.


30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라고 나는 어느 책의 첫 문장을 썼다.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나는 개가식 도서관 서고를 산책하다가 처음으로 연인과 마주쳤다. 도서관의 문학 코너는 대학생인 내가 가장 사랑하던 장소였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혹은 때때로 강의가 있는 시간이라도 나는 거의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곳은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도피처였다. 다름 아닌 젊음과 청춘으로부터의 도피처.

나는 책들 사이를 거닐면서 커다란 유리창이 석양빛으로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저녁까지 오후 내내 이어지는 산책을 했다.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책들을 건드리면서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연인. 그는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나는 연인이 뿜어내는 숨 막히는 호흡을 실제로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것이 내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읽었고, 그를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언어의 불꽃에 다시 홀리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어느 날 나는 독일 베를린의 집에서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갖고 있는 책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어둑한 책장 한구석에서 놀랍게도 다시 연인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를 안다고 생각했고,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가 어쩌면 처음보다는 조금 더 통속적이 됐을 거라고 짐작했고, 그리고 그를 잊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첫 페이지 정도만 훑어보고 다시 책장에 꽂아둘 생각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를 읽었고, 그를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형체 없는 언어의 불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연인이다. 물론 여기서 연인이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책 '연인'을 말한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갖고 있던 책 '연인'은 우리 둘의 친구이기도 한 R이 번역자였다. '연인'을 다 읽은 나는 R에게 메일을 썼다. 30년 만에 다시 읽은 '연인' 에 대해서, 뜨거운 불안에 매일매일 내면으로 타오르던 젊은 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읽었던 '연인'과 30년이 흐른 뒤 머나먼 땅 베를린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하고 처음에는 다시 읽을 생각 없이 그냥 책을 펼쳤다가 홀린 듯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던 '연인'에 대해서. 잠시 여행을 떠났던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돌아왔고, 우리는 도망치듯이 도시를 떠나 시골집으로 떠났다.

그해 여름 내내 숨 막히는 초록과 햇빛, 벌들이 잉잉거리는 시골집에서 나는 뒤라스와 함께 있었다. 한낮의 테라스에 앉아서 나는 '연인'에 이어서 '에밀리 L'을 읽었고 '고통'을 읽었고 예전에 읽었던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다시 읽었다. 일정 시기 동안 한 작가의 작품에 빠져 지내는 일을 나는 좋아한다. 내게 그런 소중한 도취의 기회를 선사한 몇몇 작가들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진짜 독서가들에 비하면 많이 읽거나 빨리 읽는 편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내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그 책이 먼저 낡아버릴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하루는 매일 변함없이 읽는 일로 시작하여 읽는 일로 끝난다. 내가 읽고 있는 시간, 그때에 내 내면의 삶이 진행된다. 읽는 일이 배제된 삶이란 나는 정말로 상상할 수 없다.


어린 뒤라스의 격정적 사랑 이야기

인도차이나, 그곳을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오래전 남중국해 바닷물에 손을 담가 본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뒤라스를 읽는 자는, 몬순과 열병의 인도차이나를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책 '연인'의 무대가 되는 장소는 1930년경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현재의 베트남이기 때문이다. 뒤라스의 대부분의 작품은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져 있고, 특히 '연인'(1984)과 '연인'을 다시 작업한 '북중국에서 온 연인'(1991)은 인도차이나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격정적인 사랑을 다룬다.

책의 첫 부분을 펼치면 15세의 한 프랑스인 소녀가 메콩강의 선착장에서 페리를 기다리고 있다. 소녀는 식민지 인도차이나로 부임한 프랑스 교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인도차이나에서 자랐으며 어머니가 있는 사덱에서 방학을 보낸 뒤 사이공의 기숙학교로 돌아가는 길이다. 소녀는 엷은 천의 민소매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었고, 놀랍게도 가냘픈 육체와 어울리지 않는 남성용 펠트모자를 쓰고 있다. 불균형과 이지러짐, 대담함과 도발 그리고 기묘한 무감각과 충동이 나타나는 차림새이다. 소녀의 아버지는 열병으로 죽었고 장남을 광적으로 편애하는 조울증의 어머니, 난폭한 큰오빠, 소녀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살펴야 할 것만 같은 작은오빠가 있다. 소녀의 가족들은 어머니의 투자 실패로 심각한 경제적 곤궁에 처해 있다.

그 페리 선착장에서 소녀는 중국인 부호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육체관계로 돌입한다. 그들은 연인이 됐다. 그러나 중국인 부호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의존하여 살고 있었고,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중국인 남자의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남자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정혼한 여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소녀는 가족과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한다. 중국인 연인이 그들의 이사 비용을 댄다. 대양을 횡단하는 증기선의 응접실에서 쇼팽의 음악이 울려 퍼지던 어느 날 저녁, 소녀는 자신이 연인에게서 느꼈을지도 모르는 어떤 감정과 조우하는 경험을 한다. 소녀는 눈물을 흘린다. 마치 사랑 이야기처럼 들리는 줄거리이다.


詩가 사라져 포르노가 돼버린 영화 '연인'

뒤라스는 이 소설을 70세에 발표했다. 어린 시절의 일들, 아픔으로 남은 가족들, 애증의 어머니, 단편적인 영상으로 남아있는 기억들, 이국적인 풍경, 몬순, 관습과 통념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관능을 알아가는 사랑의 감각들이 이 소설을 이룬다. 뒤라스 작품의 뿌리와도 같은 글쓰기의 열정(“어머니, 나는 글을 쓸 거예요”)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배경에 존재하는 채로.

'연인'은 뒤라스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매우 읽기 용이한 편이고 분량도 길지 않다. 그래서인지 1984년 출간되자마자 그해 공쿠르상을 수상하기도 전에 이미 베스트셀러가 됐다. 뒤라스는 '연인'을 자신이 “가장 쉽게 쓴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쓴 작품이 곧 쉬운 작품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연인'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뒤라스의 몇몇 단행본뿐 아니라 엄청난 부피의 주어캄프 출판사의 뒤라스 전집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인'을 읽지 않았다고 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젊은 시절 책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뒤라스를 처음 알았고, 이후로 줄곧 그에게 뒤라스는 그 무엇보다도 영화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뒤라스는 1970~1980년대를 감독과 시나리오 작업에 전념하며 거의 영화인으로 살았다. '연인'은 그 시기 이후 영화와 무관하게 발표한 최초의 작품인 셈이다.

그 해 한여름, 밤 10시가 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북독일의 시골집에서 우리는 뒤라스가 각본을 쓰거나 직접 감독한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1959), '인디아 송'(1975) 그리고 '모데라토 칸타빌레'(1960)를 보았다. 우리는 뒤라스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연인'(1992)은 보지 않았다고 했다. (뒤라스는 그 영화가 책 '연인'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반발하여 감독과 갈등을 빚었다고 알려진다.) 그가 내게 그 영화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 뒤라스의 독자로서 말하자면, 그 영화는 보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거라고. 그 영화는 책 '연인'에 나오는 관능적인 하나의 사건을 전체 줄거리로 확대해 만들어졌고, 책을 읽은 자에게 남아있는 시와 언어의 느낌들을 구체적이고 자극적인 컬러 영상으로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번역자 R이 내 메일에 대한 답신에서 적었듯이, “그 작품은 원어인 프랑스어로 읽는 것이 가장 아름답지만, 그래도 나는 오직 원문으로만 느낄 수 있는 언어의 음악과 리듬을 최대한 살리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언제나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죠! 당신도 언급했듯이 장 자크 아노의 영화, 그것은 언어에서 시(poetry)가 사라져버리면 문학작품의 줄거리가 얼마나 쉽게 포르노로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증명이기도 합니다.”



배수아 소설가
배수아 작가가 '다시 본다, 고전2'의 새 필진이 됐습니다. 1993년 데뷔해 낯설고 매혹적인 소설로 '한국일보 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한 그는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글을 씁니다.


배수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