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되지 않는 회색지대

입력
2024.04.19 17:00
18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축구인 이천수는 이번 총선에서 친분 있는 정치인 원희룡 국민의힘 후보 선거운동원으로 뛰었다. 인천 계양을에서 원 후보 유세 지원을 하면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측 지지자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고, 욕도 먹었다. 그가 총선 후 한 인터뷰를 보면 유세 지원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구독자도 많이 떨어졌고, 비방 댓글도 지우는 걸 포기했다고 한다. "정치는 모른다" 했지만 씌워진 정치 색깔이 쉽게 벗어지겠는가. 여야 유세 지원에 나선 여러 문화체육 인사가 감수하는 일일 터이다.

□ 여기에는 문화예술과 정치 분리라는 대중적 인식도 작용했을 듯싶다. 일찍이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참가선수의 정치 행위나 시위를 금한다. 그럼에도 불이익을 감수하고 정치적 의사표현을 한 스포츠인이 적지 않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선 흑인 차별에 항의해 시상대에서 '검은 장갑' 시위를 한 미국의 200m 단거리 선수 2명이 체육계에서 축출됐다. 반면 아돌프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나치의 선전장으로 만들었으니 큰 정치 행위엔 눈감은 셈이다.

□ 문화체육계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의도는 분명하다. 대중적 영향력을 빌리기 위함이다. 전체주의나 독재 국가, 전쟁 시기엔 특히 비일비재한 일이다. 자신의 신념이 투영된 이들도 있겠으나 "살아야 했다"는 논리로 순응한 문화예술인이 적지 않아 처리 과정엔 대개 정의론과 관용론이 불붙는다. 나치 치하에서 파리가 해방되자 샤를 드골은 특히 나치 부역 문인에 대한 처벌을 더 엄하게 했다.

□ '푸틴의 발레리나'로 불리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서울 공연에 우크라이나가 발끈하면서 지난달 취소됐고, 16일 개막 예정이던 볼쇼이 발레단 갈라쇼도 무산됐다. 크림반도 점령 지지 등 자하로바 이력에 비춰 러시아의 침공에 그릇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우크라이나 주장에 일리가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거대한 정치 중력에 끌려드는 문화예술계 처지를 보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다. 최근 한인회장을 지낸 우리 교민에 대해 30년 입국 금지를 한 러시아 당국의 조치는 그 여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진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