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소유물로 등장한 사과, 현대 과학과 미술까지 이끌다

입력
2024.04.16 04:30
25면
<22> 인류 역사를 바꾼 과일, 사과
4000년 전 발칸에서 유래, 현재 2500종 확산
그리스 신화 ‘헤스페리데스 사과’ 불로장생 상징
빌헬름 텔의 사과 '스위스의 자유와 독립' 의미
'내일 지구 멸망해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 심겠다'
근대 과학 발전의 획기적 계기 된 '뉴턴의 사과' 등
역사를 바꾼 사과, 한국에선 '고물가' 새 역사 상징

편집자주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학 역시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정립됐습니다. 어려운 경제학을 익숙한 세계사 속 인물, 사건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경제 관료 출신으로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으로 근무하는 조원경 교수가 들려주는 ‘세계사로 읽는 경제’는 2주에 한 번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3월 물가 오름세는 농산물이 이끌었다. 그중 과일 물가가 40.3%나 올랐다. 사과(88.2%), 배(87.8%) 가격 상승률은 각각 1980년, 1975년 관련 통계 집계 시작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맛 하나는 끝내주는 우리 사과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지난달 31일 1㎏ 사과 가격은 한국이 6.80달러(약 9,155원ㆍ국가·도시별 통계 비교 사이트 넘베오 기준)로 세계 1위였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인 사과가 세계사와 한국사 속에서 등장하는 장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사과의 역사는 기원전(BC) 20세기경 발칸반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토굴 주거지에서 탄화 사과가 발견됐는데, 그 역사는 4,000년 이상으로 측정됐다. 발칸반도의 원생종은 두 방향으로 진화했다. 실크로드 동쪽으로 퍼져 중국 서부와 시베리아를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분포한 아시아계가 하나다. 사과와 구분해 능금이라고 한다. 다른 한 종은 서쪽으로 가서 유럽 남동부인 코카서스, 튀르키예에서 2차 중심지를 형성한다. 중앙아시아의 원생 사과가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16~17세기에 전파됐다. 이후 꽃사과의 영향을 받아 여러 형태로 교배되어 개량 사과가 생겨났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사과 품종은 약 2,500종이 넘는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에 사과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사과가 흔해진 것은 로마 시대가 돼서다. 중국 사과의 역사는 2,000년 정도인데 토종 사과도 있었다. 껍질이 얇고 맛이 달아 인기가 좋았지만, 열매가 많이 열리지 않고 쉽게 상했으며 비쌌다. 청나라 시절 서양 품종이 들어와 토종이 완전히 밀려났다.

우리의 경우 고려 숙종 시절 ‘계림유사(1103년)’에서 ‘임금’으로 기술한 게 능금의 어원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내금’으로 표기했다. 임금은 발음이 쉬운 능금으로 바뀌었다. 기록은 없으나 ‘처용가’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삼국시대 능금 재배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사과는 17세기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이 중국에서 가져왔으나 재배되지는 못했다. 1890년 캐나다와 미국 선교사에 의해 길주, 원산, 서울 근교에 과수원이 만들어졌다. 1905년을 전후해 서울, 대구, 인천, 진남포, 황주에 일본인 농업이민자들이 과수원을 세웠다. 한국인으로서 1901년 원산의 윤병수가 사과 생산을 시작했다.

사과는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중요한 과일이자, 주요 사건 속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 메타포(은유)로 등장한다. 역사적 사건에서 사과가 전달하는 다양하고 깊은 뜻을 살펴봤다.

첫째,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다. 사과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들의 소유물로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과일이었다. 제우스와 헤라가 결혼할 때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사과를 선물했다. 헤라는 세계의 서쪽 끝에 있는 정원에 사과나무를 심고 아틀라스의 딸인 헤스페리데스와 100개의 머리를 가진 잠들지 않는 용인 라돈을 시켜 지키게 했다. 나뭇가지와 잎이 황금이라 황금사과가 열렸다. 고대 미술품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가 들고 있는 사과는 불멸을 염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겼다 할 수 있다.



둘째, 빌헬름 텔의 사과다. 자식의 머리에 올려놓은 표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은 잔혹하다. 1307년 11월 18일 스위스 알트도르프 마을 광장에서 활을 잡은 텔은 활을 당겼다. 화살은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정통으로 쪼갰다. 텔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방행정관이 걸어 놓은 모자에 고개를 숙이지 않은 이유로 체포됐고 벌로 활을 쏘아야 했다. 텔 이야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 덕분이다. 실러는 친구인 대문호 괴테에게서 텔의 이야기를 듣고 희곡으로 만든다. 포악무도한 지방관에 맞서 조국을 해방한 영웅 이미지를 심었다. 다수 역사학자는 텔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스위스 국민의 60% 이상이 실존 인물로 믿는다. 텔이 지방관을 죽이고 이는 스위스 독립의 신호탄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계기를 사과가 만들었다면 과언일까. 텔의 아들은 스위스의 다른 세대를 상징한다. 사과는 어쨌건 스위스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한다. 중세 이후 이야기 속에는 사실 사과의 중요한 역할이 은밀히 담겨있다. ‘백설 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주인공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다 거대한 악을 물리치는 내용이다. 사과가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라면 그 맛과 멋은 무척 오묘하다고 하겠다.

셋째, 스피노자의 사과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명언으로 알려진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유럽에서 종교 개혁가 마틴 루서(1483~1546)가 한 말이다. 루서가 어릴 때 쓴 일기장에 이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다. 독일의 아이제나흐라는 시골 마을에 가 보면 이 말이 새겨진 루서의 기념비가 한 그루 사과나무 밑에 세워져 있다. 스피노자는 왜 하필 루서의 이 말을 인용했을까? 사과는 유실수다. 나무를 심고 10년 정도가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다. 그런 먼 미래를 내다보며 인생을 설계하자는 철학자의 결기가 담겨있다고 하겠다.


넷째, 아이작 뉴턴(1642~1726)의 사과다. 이는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1665년 무렵 유럽에 흑사병이 만연하자 뉴턴이 다닌 케임브리지 대학도 1년 반의 휴교에 들어간다. 어느 날 저녁을 먹은 후 뉴턴은 날씨가 따뜻해 정원에 나가 사과나무 밑 그늘에서 차를 마셨다. 그는 이전에도 중력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순간 사과 하나가 떨어지자 그는 왜 사과는 항상 지면에 수직으로 떨어질까 생각했다. 그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게 사과라면 너무 위대하다고 하겠다.


다섯째, 폴 세잔의 사과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세잔의 그림을 보면 그 이전의 그림과 완전히 다르다.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과 색에 지나치게 집착해 형태가 또렷이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게 늘 아쉬웠다. 세잔은 빛을 어떤 색으로 표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상의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파리를 떠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작업실을 차리고 변하지 않는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세잔은 유독 사과나 오렌지 등의 과일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사과 정물은 세잔이 마음대로 위치를 바꿔도 본질이 바뀌지 않는 대상이므로 그의 생각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였다. 세잔의 위대함은 고갱을 거쳐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까지 영향을 줬다. 세잔의 사과가 없었다면 피카소도 없었을 것이다.



사과는 비타민C가 풍부해 괴혈병 방지, 항산화 방지, 피부노화 방지, 감기 예방과 면역력 증강에 도움을 준다. 앞서 2일 정부는 국내 생산 과일 중 소비 비중이 가장 큰 사과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자 ‘사과 안심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했다. 중장기적으론 기후 변화에 따른 재해 피해 증가 등의 영향이 커질 것에 대비해 재해 예방시설을 확충하려 한다. 생산성이 2배 이상 높은 스마트 과수원 특화 단지도 조성할 계획이다. 한 입 베어 문 사과로 세상을 재패하고 있는 글로벌기업 애플의 제품과 달리 사과는 수입금지 대상이다. 외국산 사과가 한국의 검역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수입 위험분석이 끝나야 과실 나무를 가져올 수 있는데, 현재로선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확언할 수 없다. 1989년 호주에 처음으로 요청한 사과 검역 분석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한국 사과의 신비스러운 맛처럼 검역 정책도 불가사의하다고 하겠다. 한국은 감귤 농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뉴질랜드에 감귤 수출을 1999년부터 24년간 추진해 지난해 수출을 성사시켰다. 이 대목에서 과일 수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마리를 얻는다. 우리 땅에서 더 많이 재배해 맛있는 사과를 보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