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호감 대통령 선거에 이어 심판론 가득한 총선이다. '정권심판론'에 기이하게 '이재명·조국 심판'이 맞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회초리를 들어서 안 되면 권력을 빼앗아야 한다”고 수위를 높였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정부가 전복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오길 바라냐”고 다그쳤다.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지만 역대 총선 최고의 사전투표율(31.28%)이 심상찮다. 더 상징적인 장면은 조국혁신당 돌풍이다. 비례 투표 지지율 30.3%, 오차범위 내 1위(리얼미터 2~3일 조사)로 치솟았다. 4·10 총선은 문재인 정권을 심판한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는 조국의 선거가 돼 버렸다.
이 심판의 악순환이 서글프다. 유권자들이 패배를 안기려는 이유는 넘쳐나지만 그렇게 승리한 쪽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국민이 반(反)문재인 기치에 이끌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신인, 숱한 설화와 무속 논란을 일으켰던 윤석열 대통령을 뽑았다. 그러고선 지금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고집하다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물가고에 공감은커녕 “합리적” 대파 운운하는 무감각에 실망하고 있다. 법치와 공정을 내세워 당선돼 놓고는 수사 외압 피의자를 대사로 빼돌린 대통령의 내로남불에 분노하고 있다.
민주당은 나을까. 180석의 민주당이 21대 국회에서 한 일은 검수완박 입법, 상임위원장 독식이었다. 방송 3법을 외면하다가 공허히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을 비판하고, 노란봉투법은 뒤늦게 통과시켰다가 대통령 거부권으로 좌초했으며, 차별금지법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22대 국회는 더할 것이다. 당대표를 지킬 후보들만 공천된 당, 양문석 김준혁 후보 논란을 모른 척하는 당, 지난 대선 때 결집한 젊은 여성 지지층을 모욕하듯 비동의 강간죄 공약을 ‘실무적 착오’라며 내팽개친 당이 뭘 해결하고 개선한다는 말인가.
제3의 대안이 조국혁신당인 현실은 모순적이다. 2심까지 유죄 판결을 받은 조 대표의 창당도,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 선거개입 범죄자(1심 징역 3년) 황운하 의원 공천도 명분이 부족하다. 앞으로 대통령 탄핵을 부추기며 혼란을 가중시킬 것인지, 개혁적 제3당 역할을 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선거가 "정치 개같이" "나베" 등 막말로 얼룩지면서 우리는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사회의 당면 과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는 기회를 잃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승리로 군사독재정권을 종식하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와 지역 구도 완화를 이뤄내고, 박근혜 대통령이 복지를 확대하며 당선된 일을 더 이상 보기 어렵다. 총선을 계기로 정당들이 쇄신하고 진보정당이 진입한 게 언제였던가 싶다. 전 세계가 기후변화와 저출산고령화에 구체적인 정책을 갖고 단계를 밟아가는데 한국만 다급한 기색조차 없이 도태 중인 것을 정치권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외국인과 소수자에 대한 포용 없이는 우리나라가 성장은커녕 존속조차 어렵다는 걸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거대 양당이 총선 한 달 전에야 후보를 내고 퍼주기·재탕 공약을 채워넣어 그나마 가장 논쟁이 된 게 조국혁신당의 '사회권 선진국' 공약이니 할 말 다 했다.
그러니 드물게 오는 주권 행사의 시간을 응징으로만 소진하는 일은 그만두도록 하자. 심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도록 하자. 심판의 이유였던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정당을 쇄신하도록 목소리 내고, 개헌으로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자. 시대적 과제가 실종된 선거는, 가장 개혁이 시급한 분야가 정치라는 것을 말해준다. 대통령 한 명 잘 뽑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복잡해지고 다원화됐다. 보복 수사와 적폐 청산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면, 이제 정치 구조를 바꿔야 한다. 심판을 벼르던 여러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