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8일까지 열리는 올해 교향악축제 중 눈에 띄는 것은 일곱 번이나 등장하는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이다. 옛 소련 시절에도 '인민의 베토벤'으로 사랑받던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에 태어나 1975년까지 살았던, 현시대와 가까운 작곡가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까지 쓰고 사망한 후 많은 작곡가들이 교향곡 10번을 쓰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일명 '베토벤의 저주'로, 이는 쇼스타코비치에 의해 깨진다. 교향곡은 물론 베토벤 말년의 음악이 집약돼 있는 현악사중주를 쇼스타코비치는 각각 15곡씩 남겼다.
쇼스타코비치는 전쟁과 폭압 체제 아래 평생 국가의 통제와 억압 속에서 작품을 썼다. 첫 교향곡부터 성공을 거뒀지만 시대적 어두움을 피하며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독재 체제에 희생된 수많은 비극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생존하며 음악을 기록한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오로지 자신과 체제를 찬양하는 데 쓰이기를 바랐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비극의 아픔을 음악에 심어 놓았다.
공산주의 예술가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쇼스타코비치 작품 연주가 금지된 적이 있다. 정작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정권의 문화 정책을 책임진 안드레이 즈다노프로부터 '형식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9번 교향곡 발표 후엔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맞았다. 1979년 6월 레너드 번스타인이 뉴욕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 공연을 갖게 됐을 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 말러 교향곡 1번을 연주하겠다고 해 주최 측의 반대에 부딪힌 적이 있다. 번스타인은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하지 못하면 내한 공연도 취소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날을 기점으로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하게 됐다.
이번 교향악축제에서는 상징성이 강한 쇼스타코비치의 대표적 교향곡과 협주곡들이 연주된다. 교향곡 8번은 그중에서도 전쟁의 비극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전쟁으로 힘겹고 두려운 시기에 쓰여 '전쟁 교향곡'으로 불리는 작품 중 하나로, 한국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수난의 역사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43년 당시의 환경과 전쟁의 상처, 내면 심리를 담아내 전체적으로 비극적이고 어둡지만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리라는 작은 희망을 엿볼 수 있는 곡이다.
5번 '혁명'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 10번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이름 철자(Dmitri Shostakovich)에서 따온 'D-S-C-H' 동기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치 대중가수들이 자신이 만든 곡에 'JYP' 혹은 'Suga(슈가)'라는 별칭을 곡 중에 넣는 것처럼, '레', '미', '도', '시' 음정을 연주하는 DSCH 동기는 교향곡 10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첼로 협주곡 1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향곡 11번은 쇼스타코비치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905년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리는 곡이다. 러일전쟁 여파로 척박해진 삶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하자, 황제의 군대와 경찰들이 무방비 상태의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1,000명 이상이 죽고 약 5,000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이 일은 이후 제1차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킨다. 스탈린 사망 후 흐루시초프의 '해빙'에 접어들자 쇼스타코비치는 사회 고발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악장마다 표제적 성격을 띤 교향곡 11번을 쓴다. '궁전 앞 광장', '1월 9일', '추도', '경종'이라는 제목과 함께 혁명가의 선율을 주제로 사용했다. 1961년에 쓴 교향곡 13번 '바비야르'에는 성악이 등장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소련 내 팽배해 있던 유대인 차별, 관료적 고위층을 비난하는 내용을 비유적이지만 구체적인 '언어'로 담았다. 초연 당시 이곡을 지휘하고 노래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갈등 안에서 분노와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작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비극적 현실과 함께 음악으로 희망을 노래해 왔다는 사실은 소리 없는 절규처럼 묵직한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