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점화된 대만발(發) 지정학적 리스크…반도체 패권 경쟁 '재부팅'

입력
2024.04.06 14:00
‘규모 7.2’ 대만 강진…현지 파운드리 위험
글로벌 공급망 개선 지적 목소리 UP
미-일, 자국 내 반도체 생산기지 구축에 ‘올인’
[아로마스픽(87)]4.1~5

편집자주

4차 산업 혁명 시대다.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연결 지능형 사회 구현도 초읽기다. 이곳에서 공생할 인공지능(AI), 로봇(Robot), 메타버스(Metaverse), 자율주행(Auto vehicle/드론·무인차), 반도체(Semiconductor), 보안(Security) 등에 대한 주간 동향을 살펴봤다.

“일부 라인의 생산 재개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신중했다. 미세공정기술이 필수인 제품 생산 특성상 작은 진동이나 충격에도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어서다. 당장 진원지에선 떨어진 데다, 사전에 준비했던 내진 설계 등으로 현실적인 피해를 최대한 줄였지만 안심할 순 없는 처지였다. 전날 ‘규모 7.2’로 발생한 강진의 여파 뒷수습이었기에 그만큼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대만의 TSMC가 지난 4일 밝힌 지진 피해 복구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지난 1987년 설립된 TSMC는 파운드리 시장에만 올인해온 업체다. 글로벌 기업인 애플과 엔비디아, 퀄컴 등에 반도체 칩을 공급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또다시 적신호가 켜졌다. 25년 만에 최대 규모로 발발한 대만 지진이 TSMC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재점화시키면서다. 중국과 군사적으로 긴장 관계인 대만이 천재지변 등에 빈번하게 노출되면서 세계 반도체 업계의 불안감 또한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비라도 하듯, 미국과 일본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기지 구축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면서 패권 경쟁도 가열되는 양상이다.

세계 파운드리 생산 70% 책임진 대만, 자연재해 등에 빈번하게 노출…공급망 다변화 목소리↑

대만을 강타한 이번 지진은 반도체 업계에도 충격파임엔 분명했다. 만약 세계 파운드리의 약 70%를 책임진 대만의 생산 라인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자칫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붕괴 상황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어서다.

일단, 핵심인 파운드리와 D램 생산 라인 등에 끼친 영향이 미미하다고 전해진 현지 소식에 한숨은 돌린 상태다. 5일 대만 시장조사기관인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대만의 주요 파운드리 공장이 이번 강진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선 벗어난 ‘진도 4’ 지역에 위치했던 가운데 자국 내 까다로운 내진 기준 덕분에 체감 진도도 1~2 정도 줄었다. 피해를 본 생산 라인의 경우, 아직까진 대량 생산 단계가 아닌 2나노(㎚·10억분의 1m) 공정이었던 것도 긍정적으로 분석됐다. D램 부분 역시 난야와 마이크론 등이 영향을 받았지만 진원지에서 거리를 둔 곳에 자리한 덕분에 조만간 정상 복구 또한 가능한 상태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에 대한 목소리는 한층 더 높아질 전망이다. 무엇보다 대만의 태생적 한계점으로 지목된 지정학적인 위험도를 분산시킬 필요가 커졌단 지적에서다. 앞선 지난 2021년과 2023년에 대만을 잇따라 덮친 기록적인 대가뭄은 반도체 시장에 감산 우려까지 제기시킨 바 있다. 생산 공정상 반도체원판(웨이퍼) 표면의 잔류물 제거를 위해선 상당한 양의 물이 필요하다. 반도체 공정이 최첨단으로 올라갈수록 물의 소비량도 더 늘어난다. 반세기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새겨졌던 2021년 당시엔 대만 정부에서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물을 농업용수로 대신할 정도였다. 한 치의 오차에도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반도체 생산 공정의 특성 때문이다.

이번 지진에 대해서도 선방은 했지만 피해를 피할 순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일시적인 가동 중단임에도 조업 재개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선 수천만 달러의 비용과 부정적인 파급 효과도 가져올 수 있어서다. 궁극적으로 대만에 집중된 반도체 공급망에 변화가 필요하단 분석이 비중 있게 나온 이유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파운드리 생산의 69%가 집중된 대만에서 벌어진 이번 지진 사고로 단일 공급망에 따른 리스크는 한층 더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내다봤다.

일본과 미국, 천문학적인 지원 앞세워…반도체 생산기지 구축

이 가운데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반도체 강국 부활’을 선언하고 나선 일본과 미국의 움직임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양국 모두 반도체 생산기지 구축에 발 벗고 나선 상황이다.

일본은 지난 2일 자국 업체인 라피더스의 첨단 반도체 개발에 최대 5,900억 엔(한화 약 5조2,700억 원)을 추가 지원한다고 밝혔다. 교도통신에 의하면 사이토 겐 경제산업장관은 이날 국무회의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차세대 반도체는 일본 산업 경쟁력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경제산업성도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라피더스는 도요타와 기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대표 대기업 8곳이 첨단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지난 2022년에 설립한 기업이다. 라피더스는 최첨단 2나노 제품을 2025년에 시험 생산한 데 이어 2027년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서 일본 정부가 라피더스에 3,300억 엔을 지원하겠다고 전한 발표까지 감안하면 이번 추가 조치에 따라 총지원금은 총 9,200억 엔(약 8조2,000억 원)까지 늘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위해 2021년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맞춰 약 4조 엔(약 35조 원) 규모의 지원 예산을 확보하면서 전폭적인 지지에 나서고 있다.

발 빠르게 움직이긴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 백악관은 지난달 20일 성명에서 “상무부는 반도체법에 따라 인텔에 최대 85억 달러(약 11조4,000억 원)의 직접 자금과 대출 110억 달러(약 14조8,000억 원)를 제공하기로 예비적 합의에 도달했다”고 알렸다.

반도체법은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설비투자 장려를 위해 마련됐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엔 반도체 생산 보조금으로 총 390억 달러(약 52조3,000억 원)를, 연구개발(R&D) 지원금으로 총 132억 달러(약 18조 원) 등을 포함해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70조7,000억 원)까지 지원할 수 있다. 미 정부는 이런 조치들을 통해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생산점유율에서 10% 미만인 자국 내 비중을 2030년까진 20%로 늘리겠다는 복안이다.


허재경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