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대화 단절한 오빠… 계속 없는 듯 살아도 될까요"

입력
2024.04.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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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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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학생 때 오빠가 제게 두어 차례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큰 상처를 받았고, 힘이 센 오빠를 상대로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습니다. 남동생이었다면 치고받고 싸우면서라도 응어리진 마음을 풀었을 텐데. 그 이후 20년 넘게 오빠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요. 제가 결혼한 뒤론 따로 살다 보니 얼굴을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고요.

오빠는 지금 30대 후반인데 뚜렷한 직장이 없는 상태입니다. 오빠와 저는 우애 좋은 남매로 지내기에는 애초부터 성격이 정반대였습니다. 저는 외향적인데 오빠는 내향적이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자전거나 컴퓨터 같은 것들을 두고 자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오빠와의 사이에 불화가 시작된 건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어요. 당시 오빠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집에 있을 땐 게임에 빠져 있곤 했죠. 일생을 근면성실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은 오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큰소리로 오빠를 혼냈고, 가끔 체벌하기도 했습니다. 전 오빠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게 너무도 싫었어요. 엉엉 울면서 등교한 날도 있었죠. ‘오빠만 없어지면 모든 게 편해질 텐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관계도 원만한 편이었고, 교우 관계에서도 별문제 없이 살아왔습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편입니다. 미리 세운 계획이 틀어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때론 주변에서 인정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별 탈 없는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제 삶에 있어서 가끔은 오빠라는 존재가 너무 큰 오점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오빠와 부모님과의 갈등은 계속됐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무시하며 살았고요. 오빠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번번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어요. 결국 제때 사회에 진출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죠. 부모님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매우 힘들어하셨어요. 이기적이지만 부모님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빠와 저의 관계는 더 좋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고 있습니다. 마주칠 일이 있어도 꼭 해야 하는 말 외엔 대화가 아예 없고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린 아기를 돌봐야 해서 부모님과 오빠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도 언젠가는 노쇠해지실 테고 자식들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오겠죠. 그러면 여태까지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갈등이 떠오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빠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이 속 편한 것 같아요. 제가 바라는 건 단 하나입니다. 가족 관계에 큰 갈등이 없었으면 하는 것인데요.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요?

박지연(가명·33·직장인)

사연을 읽으며 오빠와 관련된 복잡한 감정으로 마음고생이 참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연씨는 오빠와 이렇게 계속 지내도 될지 물었지만, 이처럼 현실적인 문제의 이면에는 자신의 내면에 감정적인 갈등이 더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연씨에게 가장 핵심적인 갈등은 무력감이 아닐까 합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든 해결하거나 돌파하거나 또는 빠져나올 수 없다고 느끼는 감정이죠. 오래전 오빠에게 폭력을 당한 뒤 강한 무력감을 느꼈을 거예요. 어렸을 때 무력감을 크게 느낀 분들은 성인이 되고 난 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하나 조심하거나 치밀하게 계획하는 성향이 되기 쉽습니다. 계획이 틀어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도 이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오빠와 관련된 복잡한 감정을 먼저 이해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지연씨의 마음이 괴롭고, 앞으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런 감정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죠. 오빠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 지연씨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언제 직장이나 사회에서 만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다 보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지연씨의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커질 수 있겠죠. 아직은 아이가 어리지만 성장하면서 지연씨가 싫어하는 성향이나 성격, 행동방식이 나와서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런 걸 이해하고 수용하기보다 지나치게 통제하려 하거나 회피하려 한다면 갈등의 악순환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빠에 대한 감정 중에는 오빠가 영향을 끼친 가족 분위기에 대한 감정도 있을 겁니다. 10대 시절 아버지가 오빠를 혼내는 걸 보면서 무서웠을 수도 있고 짜증이 났을 수도 있죠. 오빠에 대한 직접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부모가 오빠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나의 감정, 부모의 영향을 받아 오빠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까지 함께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겁니다.

지연씨의 성향 중 일부는 부모님과 오빠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어요. 형제가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우니 부모님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나라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더욱 성실하게 사는 경우도 있고, 형제가 부모님에게 혼나는 걸 타산지석으로 삼아 모범적으로 사는 경우도 있죠.

지연씨는 오빠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무력감과 여러 부정적 감정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어 자연스럽게 초점이 가족으로 맞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지연씨의 정서적 안정감, 심리적 건강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지연씨의 안테나는 상당 부분 오빠에게 가 있을 가능성이 커요. 오빠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가족 내 분위기를 살피게 될 텐데 그럴수록 악순환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놓치기 때문이에요. 오빠 때문에 불편한 감정, 그런 나의 감정을 부모님이 신경 쓰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는 마음이 우선 있고, 내가 행동을 하든 하지 않든 그에 대한 오빠의 반응이 있을 테니, 관련된 생각과 감정이 또 생기겠죠. 이렇게 연쇄적으로 ‘지금 내 감정은 어떠한가’ 하며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자기 감정에게 집중시키는 연습을 꾸준히 해보는 게 좋습니다.

오빠와 관련해서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감정은 배신감입니다.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할 가족 구성원에게 신체적 폭력을 당하고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배신감은 굉장히 뿌리가 깊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상대가 배신하거나 믿음을 저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깊이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거리를 두다 보면 별문제는 없어도 때론 인정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죠. 지연씨의 독립적인 성향도 타인을 의지할 만큼 신뢰하지 못하고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경계심과 두려움 때문에 생긴 반의존적인 독립심일 수 있습니다. 또한 오빠에게 경험한 배신감을 보상하기 위해 부모님에게 정서적으로 더욱 의존했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에 지나치게 이입해 오빠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더욱 악화됐을 수 있고요.


지연씨는 무력감을 보상하려고 가급적 많은 것을 자기의 통제 안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이 관계에 대한 부분으로 이어지면 상대방이 자신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길 은근히 바라게 되니 더 문제가 생깁니다. 내 기준과는 별개로 상대방의 주관과 의지가 있고, 그건 내 영역이 아니란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아이를 대할 때 이런 점이 특히 중요해요. 아이가 성장하며 자기주장을 할 때 지나친 무력감을 경험하며 아이에게 거리를 두거나 반대로 강압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질적 해결책을 찾기 전에 이런 복합적인 상호 영향과 그로 인한 감정을 잘 이해해야 해요. 오빠와의 문제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등이 커지고 괴로워지니 미리 거리를 두거나 회피하려 하는 패턴이 오래됐을 겁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일부분 비슷한 패턴을 계속해 왔을 것이고요. 이제 그런 회피의 패턴을 끊고 직면하는 연습을 해볼 필요가 있어요. 물론 당장 바꾸기는 쉽지 않을 테니 자신의 감정을 잘 헤아리면서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오빠와 관련된 복잡한 감정들을 적절히 다룰 수 없는 상황에서 회피 패턴이 강화된 지연씨는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패턴에 익숙할 수 있습니다. 회피하다 보면 당장은 안전할 수 있지만 다가가고 소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강해지고 삶의 영역이 제한되게 됩니다. 조심스럽게 조금씩 시도해보다가 ‘생각보다 괜찮구나’ ‘갈등이 생기더라도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나진 않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면 점점 선순환이 될 겁니다. 우선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을 헤아린 뒤에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디뎌 보며 오빠와 관련된 갈등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제한된 부분들이 풀려 가시길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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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고경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