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한국 사회를 끈질기게 배회하는 ‘집게손가락 망령’의 기저에는 화난 남성들이 있다. "거대한 악의 세력인 페미니스트 집단이 암약하며 마땅한 남성의 몫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집게손가락이라는 남성 비하의 상징을 곳곳에 심어 조롱까지 일삼는다"는 분노. 이런 분노가 한국 남성만의 것은 아니라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이야기가 담긴 책, 미국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의 ‘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1999)이 2024년의 한국에 도달했다. 전작 ‘백래시’와 ‘다크룸’에 이은 팔루디의 3부작이다.
‘스티프트’의 배경인 약 20년 전의 미국에선 여성해방운동 물결이 뒤흔든 1970년대를 지나며 설 곳을 잃었다고 여기는 남성들이 ‘남성성의 위기’를 꺼내들었다. “페미니스트가 세계를 망쳤다”라는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부’의 주장이 아니었다. 교육자뿐 아니라 의사, 종교인 등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스티프트’를 번역한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4일 한국일보에 “한국과 충격적일 정도로 비슷하다”고 말한 이유일 테다.
1980년대 미국의 신보수주의의 페미니즘을 향한 전방위적 공격을 촘촘하게 기록하고 논박한 ‘백래시’(1991)로 퓰리처상을 탄 직후의 팔루디는 이를 그저 한심한 패배자의 한탄이라 간과하지 않았다. 기승전 ‘페미 탓’을 하는 이들에게 “남자들은 어째서 그들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품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성난 백인 남성들’ 수백 명을 만났다. 문 닫은 조선소 해고 노동자부터 성폭력을 일삼는 십 대 소년, 여성 입학이 허용된 사관학교 생도, 우파 기독교 성향 ‘남성단체’의 활동가, 영화 ‘람보’로 미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할리우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까지.
이들을 만나기 전 팔루디는 “미국 남성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남자들의 행동일 뿐 어떤 구조적인 일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이면서 페미니스트인 팔루디에게 자신의 실패를 숨김없이 털어놓은 ‘성난 남성들’에게 쓰라린 배신의 기억을 안긴 건 아버지, 기업, 나아가 국가였다는 걸 확인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문을 연 신보수주의 시대에 미국 경제는 나아졌지만 그를 지지했던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했다. 2016년 대선 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투표한,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남성들은 또 어떤가. 트럼프는 “나야말로 당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인물”이라고 외쳤지만, 그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절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성가족부 폐지, 여성 징병제 띄우기 등으로 정부와 정치권이 젊은 남성들의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한국의 현실은 또 어떤가.
팔루디와 만나 자신의 여자친구가 “나보다 돈을 더 잘 번다”는 불만을 털어놓은 미국 남성. 이 남성은 “여자들은 수영복 모델을 1년만 하면 집을 살 수 있다. 그냥 엉덩이를 흔들면 되는 것”이라면서 “가끔은 내가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개탄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남성들이 이를 여자 탓하는” 모습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것 없다는 것이 손 평론가의 말이다. 새로운 경제체제의 승자가 여성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남성들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여성의 현실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쯤에서 삐딱한 질문 하나가 떠오를 만하다. 남성은 페미니즘을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 하는데 왜 1,200쪽을 빼곡하게 채운 남성들의 억울함 호소에는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백래시’와 ‘다크룸’에 이어 1년을 넘게 매달려 ‘스티프트’를 번역해 팔루디의 대표작을 모두 한국에 내놓은 손 평론가에게 물었다. 그는 “여성이 남성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그러나 페미니스트는 들어야 한다”고 답했다. “아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시대라면 페미니스트야말로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손 평론가의 말은 수백 명의 성난 백인 남성들을 만나면서 “‘저항하지 않는 남자들’이라는 미스터리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다”고 쓴 팔루디의 결론과 닿아있다. 그것은 결국 조금이라도 더 나은 “양성 모두에게 문을 열어 줄 인간 진보의 패러다임”을 향한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