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국가 여론 주도층 과반수가 미국과 중국 두 패권국 중 한 국가 손을 잡아야 할 경우 중국을 선택하겠다고 답변했다. 중동 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이슬람 국가 내 인기가 떨어진 데다 경제력을 앞세운 중국의 입김이 동남아에서 점점 강해지는 상황이 맞물린 결과다.
2일 동남아시아 전문 싱크탱크 ISEAS-유소프 이삭 연구소 ‘2024년 동남아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응답자 10명 중 5명(50.5%)은 '아세안이 미국과 중국 중 한쪽과 협력해야 한다면 중국을 지지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중국 선호도는 지난해 조사(38.9%)보다 11.6%포인트 늘었다. 미국 손을 들겠다고 선택한 비율은 지난해 61.1%에서 올해 49.5%로 급락했다.
지난 1월 3일부터 2월 23일까지 진행된 이번 조사에는 학자, 정책 입안자, 사업가, 시민사회 지도자, 언론인, 국제기구 관계자 등 아세안 오피니언 리더(여론 주도층) 1,994명이 참여했다.
연구소가 2020년 해당 질문을 시작한 이후 중국 선호도가 미국을 앞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세안 10개국 가운데 대(對)중국 신뢰가 전년보다 낮아진 국가는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갈등을 빚는 필리핀(21.2→16.7%), 베트남(22.1→21.0%)과 싱가포르(38.9→38.5%) 정도다.
인식 변화 주요 동인은 ‘중동 전쟁’과 ‘차이나 머니’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면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커졌고, 중국이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의미다.
실제 응답자 중 46.5%는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을 지정학적 측면에서 가장 큰 관심사로 꼽았다. 동남아의 고질적 문제인 남중국해 갈등(39.9%)보다 높았다. 특히 무슬림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에서는 중국 호감도가 지난해보다 10~20%포인트 정도 오르면서 4명 중 3명이 중국을 선호 국가로 꼽았다.
중국 자본력도 영향을 미쳤다. 응답자 10명 중 6명(59.5%)은 '아세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대국'으로 중국을 꼽았다. 특히 라오스(77.5%) 말레이시아(66.7%) 캄보디아(59.8%) 미얀마(59.8%)가 평균 이상의 지지를 보냈다. 모두 중국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건설 사업)' 수혜국이다.
다만 중국에 대한 아세안의 불신도 커졌다. '중국이 세계 평화, 안보, 번영 등에 기여하기 위해 올바른 일을 할 것인지 확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절반(50.1%)은 ‘거의 없다’거나 ‘전혀 없다’고 답했다. ‘중국 영향력 확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10명 중 6명 이상(67.4%)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보고서를 작성한 샤론 세아 ISEAS 선임연구원은 “(동남아 국가에서는) 중국 군사력이 자국 주권을 위협하는 데 이용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다”며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국가가 없어진다면 이 지역에서 중국의 입김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의 위상은 다소 높아졌다. ‘아세안에 중요한 전략적 대화 파트너’ 순위에서 한국은 5.71점(11점 만점)을 얻어 중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에 이은 5위를 기록했다. 10명 중 1명(10.3%)은 한국을 ‘가장 방문하고 싶은 국가’로 꼽았다. 해당 질문에서 한국이 두 자릿수 지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