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8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고급 주택가. 알베르토 니스만(당시 51세)의 어머니 사라 가르푼켈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열 시간 넘게 아들과 연락이 안 됐다. 아파트 관리인이 자택 문을 두드렸지만 묵묵부답. 열쇠공을 불러 육중한 현관문을 여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집에 들어선 순간 가르푼켈은 결말을 직감했다. 집 안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가득했다. 아르헨티나 경찰은 후일 니스만이 자택 화장실 바닥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고, 니스만의 손에는 지인 디에고 라고마르시노가 빌려준 캘리버22 권총이 들려 있었다. 라고마르시노는 니스만을 돕는 정보기술(IT) 기술자였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서둘러 사건을 자살로 결론짓는 듯 보였다. 사건 발생 11일 만에 수사 당국이 이미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는 언론 보도가 흘러나왔다. 검찰은 초기 부검 결과 저항 흔적이 없다고 판단했다. 권총을 쥐고 있던 손에 화약이 묻어있지 않은 점 등이 의문스럽다는 반론이 제기됐지만, 당시 검찰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니스만이 자살한 것 같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국민 대부분은 정부의 결론을 믿지 않았다. 니스만이 자살했다고 보기에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이 너무나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당시 이 사안을 다룬 기사에서 “니스만의 죽음은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과 지하드(이슬람 성전) 테러리스트,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복잡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죽음이 ‘중남미 최악의 테러’라고 불리는 사건 수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약 11년 전인 2004년 7월. 니스만은 정권과 국민 모두의 기대를 받는 검사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수모’로 기억되는 폭탄 테러 사건 수사를 맡으면서다. 1994년 7월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르헨티나-유대인 친선협회(AMIA) 건물에서는 자폭 테러가 발생해 최소 85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다쳤다. 7층 건물이 폭삭 내려앉은 참혹한 현장은 아르헨티나 국민, 특히 30만 명 규모의 유대인들 마음에 충격과 분노로 깊이 각인됐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는 사건 발생 10년이 다 되도록 사건 배후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의회는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친(親)이란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조직원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아르헨티나 검찰은 범인 추적에 별 성과를 못 냈다. 되레 자국민 22명이 “테러에 간접적으로 연루됐다”며 기소됐는데, 2003년 법원은 피고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취임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은 “국가적 치욕”이라고 규탄했다. 그는 4년 후 정권을 넘겨받은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의 남편이다.
혼란 속에 사건 특별검사로 지명된 니스만은 속전속결로 수사를 이끌었다. 유대인인 그는 사건 담당 1년여 만인 2005년 11월 헤즈볼라 소속 대원 이브라힘 후세인 베로가 테러를 저지른 장본인이라고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 등 이란 고위 인사 8명을 아르헨티나 법원에 기소했다. 이들이 1993년 8월 14일 이란 특수작전위원회 회의에서 테러 결정을 최종 승인했다는 게 니스만의 결론이었다.
신속하고 폭넓은 수사는 즉각 반향을 일으켰다. 테러 피해자 유가족인 세르히오 부르스타인은 아르헨티나 매체 라나시온에 “매우 중요한 돌파구”라고 반색했다. 인터폴은 2007년 니스만이 기소한 알리 팔라히안 전 이란 정보장관 등 5명에 대해 적색 수배를 내렸다. 니스만이 미 FBI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해외로 망명한 이란 전직 정보요원 등과 폭넓게 협력한 결과였다.
‘잘 드는 칼’의 성과를 특히 만끽한 것은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 부부였다. 대내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청산하는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었고, 대외 관계에도 특별히 나쁠 것이 없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 등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조지 W 부시였다. 2008년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이란을 비난하자, 부시 대통령은 “이란은 테러 후원국”이라고 거들었다. 뉴요커는 “수년 동안 니스만에게는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보다 더 큰 지지자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검사와 대통령의 관계는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수사는 교착 상태에 빠진 반면, 아르헨티나의 대내외 환경은 달라지고 있었다. 니스만은 이란이 혐의를 강력 부인한 채 신병 인도를 거부하자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테러 발생 2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며 국민적 관심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반면 아르헨티나와 이란 관계에는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2005년 양국은 교역이 전무했지만, 2010년에는 교역 규모가 15억 달러(약 2조 원)에 달하는 무역 파트너로 성장했다. 이란은 서방 제재를 피해 남미 좌파 정부와 접촉면을 넓히고 있었고, 아르헨티나는 이란산(産) 석유가 점점 필요해지고 있었다. FT는 “아르헨티나는 에너지 자립국이었으나 2010년부터는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량이 줄어들며 수입국으로 전환했다”고 짚었다. 미국 정권 역시 2009년부터 중동과 ‘대화 외교’를 표방하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로 넘어왔다.
이런 가운데 페르난데스 정부가 이란과 관계 개선을 대가로 테러 사건을 묻으려 한다는 고발이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매체 페르필이 이란 내부 보고서를 입수해 2011년 이같이 보도한 것이다. 매체는 이란 외무부가 “아르헨티나는 과거 테러 사건을 수사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이란과의 경제관계 개선을 선호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폭로했다. 이어 “이란 정보부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인터폴에 이란 관료들에 대한 적색 수배 취소를 요청할 전망”이라고 전했다.
실제 움직임도 있었다. 2013년 2월 양국은 폭탄 테러 사건을 공동 조사하겠다며 ‘진실위원회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란 정부는 위원회가 설치되면 이란 당국자들을 직접 심문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건 피해자 및 유대인 단체는 “살인자를 수사에 초대하는 격”이라고 반발했다. 영국 BBC방송은 “지난 9년간 이 사건을 조사한 니스만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니스만은 반(反)정권 운동의 기수가 됐다. 각종 TV프로그램에 출연해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이 위헌적으로 사법 절차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을 쏟아냈다. 갈등은 특히 2015년 1월 14일 니스만이 법원에 289쪽짜리 공소장을 추가 제출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는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과 엑토르 티메르만 당시 외교장관이 이란 당국자 수사를 막았다면서, 법원이 이들을 증인으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요구했다. 니스만은 닷새 후인 19일 의회 비공개 청문회에 출석할 예정이었지만, 하루 전날인 18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는 니스만 사망의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BBC는 “나스만 사망 한 달 만에 수십만 명이 폭우 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역을 행진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같은 해 1월 19일 야당 소속 파트리시아 불리치 당시 하원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틀 전 니스만이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결국 아르헨티나 법원은 같은 해 3월 “타살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같은 해 12월 대선에선 ‘철저한 진상 규명’을 공약한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가 당선되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2017년 12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연방법원은 “니스만은 살해당했다”고 판결했고, 이듬해 6월 연방 항소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수사관들은 니스만이 마취제의 일종인 케타민을 흡입한 후 자택에서 가해자 두 명에 의해 살해됐다고 판단했다”며 “시신 곳곳에서 잔혹한 폭행에 의한 타박상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니스만 살인범은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정부 및 검찰, 이란, 헤즈볼라, 미국, 이스라엘 등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암살 주체를 지목했다. 권총 주인이었던 라고마르시노가 살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진실위원회 설립은 이란 관련 수사를 멈출 수 없다는 아르헨티나 정부 입장에 따라 무산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니스만의 죽음은 아르헨티나 ‘사법의 정치화’에 대해 논쟁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평가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아르헨티나 정치권의 정쟁 수단으로 소비됐다. 특히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상원의원과 부통령 등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일부 정치인들은 그와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니스만의 죽음을 상기시켰다. 2017년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은 니스만 수사 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2021년 무죄 판결이 났으나, 대통령 재임 시절 부정부패 혐의로 2022년 1심 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법정 구속은 면한 채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니스만이 자신의 죽음을 수사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BBC는 “그는 높은 평가를 받은 집요한 검사였다”며 “AMIA 테러 책임자가 누구인지, 아르헨티나 정부의 수사 은폐 시도가 있었는지, 니스만의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이제 결코 알려지지 않을 듯하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