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추모석 옆 쓰레기가 산더미"… 방치·훼손되는 참사 애도공간

입력
2024.03.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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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 칼부림, 신당역 사건서도 마찬가지
지자체 관리 근거가 없어... 제도개선 필요

"돌아가신 분들 추모하는 시설이잖아요. 그런데도 너저분하게 쓰레기가 놓여 있는 걸 보면 착잡하죠."

28일 서울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종종 이태원을 찾는다는 시민 이모(28)씨는 이곳에 설치된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표지판'을 보더니 안타까워했다.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사망자를 기리기 위해 설치된 표지판은 아무런 배려나 존중을 받고 있지 못했다. 주변에는 상인과 행인이 내다 버린 쓰레기봉투와 종이상자 등이 가득했다. 표지판 옆에는 '불법 광고물 부착과 종량제 봉투 배출을 자제해달라'는 안내문이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씨는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쓰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형 참사나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설이 무심히 방치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잇따른다. 사건 당시 반짝 관심을 받다가 골칫거리 취급을 받기 일쑤고, 방치를 넘어 고의적 훼손 사건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관련 법령의 부재로 지방자치단체 등의 직접 개입이 불가해 관리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청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표지판은 참사 1주기를 맞은 지난해 10월 설치됐다. 하지만 다시 이태원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설치 반년도 안 돼 이곳은 매일같이 쓰레기와 전쟁을 치르게 됐다. 주변 편의점에서 6개월 이상 근무했다는 김모(24)씨는 "추모 표지판 근처에 쓰레기가 놓여 있는 걸 본 지 한 달이 넘었다"며 "사람들이 추모 공간으로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펜스라도 설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지자체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쓰레기 관련 민원은 잇따르지만, 문화재가 아닌 일반 시설물에 대해선 방치나 파손에 관한 법령이 미비해 경찰 신고 등이 없다면 구청이 직접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청은 주변 상인들에게 쓰레기를 내다 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신고나 고발로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될 수는 있지만 범칙금이나 과태료 부과를 명령하는 규정은 없다"면서 "청소행정과 등 관련 부서가 순찰을 돌거나 야간에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토로했다.

이태원처럼 지자체가 신경을 쓰는 곳은 그나마 다행이다. 시민단체 등이 관리하는 임시 추모공간은 사건 직후 반짝 관심을 받은 뒤 방치되거나 심지어는 훼손되기도 한다. 지난해 7월 서울지하철 2호선 신림역 인근에 설치된 흉기난동 사건 추모 현장에서는 유족 동의 없이 성금함을 놓거나 포스트잇을 떼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2022년 10월 서울지하철 6호선 신당역 인근에 마련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추모공간에서도 시민들의 애도가 담긴 포스트잇, 피켓 등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관리 위한 별도 조례 제정 필요"

이런 추모 공간이 국민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참사 발생 경고 기능을 분명히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방치나 훼손 방지를 위한 근거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공식 설치하는 추모 공간이든, 시민단체나 시민들이 직접 설치하는 공간이든 관할 구역을 담당 지자체에서 관리 관련 조례를 제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때 지역 주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장재민 한국도시정책연구소장 또한 "(이태원 참사 추모 표지판 옆에 설치한 경고 설치물처럼) 감시 등을 위한 시설물 설치는 일시적 효과가 있을 뿐 이를 관리하는 주체 지정과 근거 마련이 우선"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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