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넘실대는 2024 한국 미술, 여성을 다시, 똑바로 보다

입력
2024.03.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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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작가의 출산, 육아 경험 확장한 작품
동아시아 불교미술 속 여성 역할 발굴 전시
① 학술 연구 선행 ② 여성 관람객 성장에
전시장은 지금 '여성주의 미술'의 물결

2020년 제20회 송은미술대상을 받은 조영주 작가의 또 다른 정체성은 '엄마'다. 2016년 아이를 출산한 그는 아기의 배변, 수면, 수유의 순간을 기호화해 육아일지를 썼다(또는 그렸다). 선 위에 기록된 아이의 패턴은 반복적이면서도 예측할 수 없어 독특한 리듬감을 자아낸다. 그는 이 기록을 음으로 변환해 소나타 형색의 곡으로 만들고 안무를 더해 자신의 신체로 퍼포먼스를 더했다. 영상작품 '나의 몸을 쓰는 것(2019)' 이야기다.

서울 강남구 송은에서 진행 중인 조 작가의 개인전 '카덴짜'는 주변화된 여성의 존재와 노동을 중심부로 소환하며 '여성의 주체성'에 주목한다. 여성의 삶, 엄마로서의 삶을 설치작품으로 표현했다.

'여성'은 2024년 한국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에서 빠트릴 수 없는 열쇳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여성과 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를 줄줄이 선보인다. 다음 달엔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를 조망하는 '조경가 정영선'이 열린다. 5월에는 '여성의 일이나 취미'로 여겨졌던 자수를 주제로 공예, 장인, 노동, 생활, 산업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한국 근현대 자수'가 개막한다. 9월에는 여성주의 미술만을 전면에 내세운 국제기획전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을 선보인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아시아 여성 미술을 소재로 최근 국제 미술계에서 새롭게 조명되는 여성주의 미술의 다층적 면모를 살필 것"이라는 게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이다.


'여성의 주체성'에 집중하는 한국 미술

2015년 페미니즘 물결이 다시 거세진 이후로 대중문화와 문학은 '여성의 주체성'에 주목했다. 이 같은 흐름은 미술계에도 도달했다. 윤석남, 김수자, 이불 등 1세대 한국 여성 작가들이 억압된 여성성과 여성 해방을 작품으로 말한 지는 오래된 일이다. 미술사학계에서는 민중미술계열 여성 작가 동인모임 '시월'의 1986년 전시 '반에서 하나로'를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기점으로 본다.

최근의 경향은 더 전방위적이다. 과거엔 작가가 여성주의 미술을 견인했다면, 현재는 작가, 미술을 여성주의적으로 향유하는 대중, 연구자가 함께 이끈다는 게 미술연구자들의 견해다. ①미술사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조명하는 학계의 노력이 선행되고 ②일상 속 평등에 민감한 젊은 여성들이 미술 향유 계층으로 성장해 손발이 맞으면서 한국 미술에 또 다른 페미니즘을 불어넣고 있다는 의미다.

현대미술 넘어 전근대미술까지 확장된 '여성주의 미술'

27일 삼성문화재단 호암미술관에서 개막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은 한국·중국·일본에서 발전한 불교미술을 '젠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다. 페미니즘과 친숙한 현대미술이 아닌 전근대미술을 해석하는 데에 젠더라는 인식틀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른 종교나 학문과 마찬가지로 불교 안에서 여성의 역할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불교는 "여성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부족해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고 가르쳤고, 불교미술 안에서 여성은 어머니 기능을 하는 데 그쳤다. 부처와 보살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한·중·일에 불교가 전파된 이래 여성들은 불상과 불화를 조성해 불교를 지탱한 기둥이자 열렬한 불교미술의 후원자였다. '숭유억불' 기조가 강했던 조선에서도 왕실 여성들은 궁궐 안에 내불당을 두고 신앙에 적극적이었다. 16세기 중반 문정왕후는 명종의 건강과 왕손의 탄생을 기원하며 400점에 달하는 불화를 발원할 정도로 불교미술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전시는 이때 제작된 작품 중 현전하는 '석가여래도' '약사여래삼존도' 등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일본의 수불(자수를 놓아 회화처럼 표현한 양식) 2점에는 부처와 보살을 묘사하는 가장 신성한 부분을 불온하다고 여겨졌던 여성의 신체 일부인 머리카락으로 수놓아 여성의 주체적인 창작 행위를 증거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승혜 큐레이터는 "2019년 전시 아이디어를 냈을 즈음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미술계에서도 여성을 조명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며 "불교미술에도 굉장히 많은 여성들의 존재가 있는데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고 전시 취지를 설명했다.


① 미술 속 젠더 논의 활발해지니... 전시 풍성해지고

지난해 이 전시의 사전 학술프로그램인 '한국 미술과 젠더'라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과 한국미술사학회, 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는 국내외 연구자들이 한데 모여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고려, 신라 등 전근대미술을 젠더의 시각으로 검토해 연구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취지였다.

미술연구자들은 이 학술대회를 젠더 관점의 해석이 전체 미술 영역으로 확장된 기점이라 평가한다. 현대미술을 제외하고 동양미술, 한국미술, 전통미술 영역에서 젠더 논의는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대회를 계기로 여성예술인을 조명하고 작품 속 여성 이미지를 연구하는 논의가 활발해지며 담론이 구체화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미술사학자(한국외국어대 교수)는 "한국의 전근대미술에서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매우 적은데, 학술대회와 연구자들의 연구가 선행돼 전시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② 여성 미술 애호가들 저력에... 전시 다양해지고

학술 연구가 여성주의 미술 전시를 견인한다면, 대중의 호응은 전시의 다양화를 뒷받침한다. 여성주의 관점 전시에 호응하는 관람객이 늘어나면서 여성을 주제로 한 전시 기획이 힘을 받는다. 여성 관람객의 미술 사랑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미술 전시회 관람률은 7.7%로 남성 관람률 5.6%보다 높았다.

강은주 미술사학자는 "MZ세대 여성들에겐 미술을 통해 삶의 방향을 찾거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환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며 "이들이 전시를 자주 찾고 미술 책도 사서 읽으면서 미술 전시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수진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여성주의 미술 작가들의 활동은 꾸준히 있었지만 작업이 힘을 얻으려면 결국 관람객과 후원자라는 토대가 받쳐줘야 한다"며 "전시를 찾는 여성 관람객은 앞으로도 미술 안에서의 여성의 이야기를 궁금해할 것"이라 말했다.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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