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수박농사에 이런 사달은 처음이라요. 햇볕이 나야 할 텐데,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니까. 다 갖다 내버려야지.”
지난 22일 경남 함안군 대산면에서 만난 강주홍(63)씨는 수박 작황을 묻는 질문에 고개부터 내저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비닐하우스 1개 동 약 660㎡(200평)에서 8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렸다는 그는 “올해는 품삯은 고사하고 모종 값이나 벌면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비닐하우스 안을 들여다보니 강씨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출하가 코앞인 수박은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았고 그마저도 가물에 콩 나듯 했다. 줄기는 누렇게 메말라 손대는 족족 바스러졌다. 지난달 초 일부를 갈아엎고 다시 파종한 곳도 곰팡이병이 발생해 수확을 장담하긴 어려워 보였다. 강씨 입에서 “아예 수확을 포기하는 게 속 편하다”는 말이 나올 만했다.
유례없는 작황 부진은 날씨 탓이 크다. 국내 겨울수박의 70%를 생산하는 함안에선 11~12월 모종을 심어 100일이 지나면 수확한다. 그런데 꽃이 피고 벌이 수정을 할 무렵부터 사흘에 하루꼴로 비가 왔다. 지난 1~2월 함안의 강수량은 145.5㎜로 평년 대비 3배가량 많았던 반면 일조시간은 320시간으로 평년의 80%에 그쳤다. 흐린 날씨로 수정이 잘 되지 않아 착과 수는 줄고 과실은 기형으로 자랐다. 경남도에 따르면 잠정 집계한 피해 면적만 344㏊, 축구장 480개를 합친 것보다 많다.
강씨는 “무게는 최소 3㎏에 당도는 10브릭스를 넘어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데 지금은 기준을 충족하는 상품이 거의 없다”며 “통상 겨울수박은 제사상 등에 주로 쓰여 귀신이 먹는 수박이라 하지만 이건 귀신도 안 먹을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량도 줄었지만 가격은 지난해보다 떨어졌다. 서울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일반수박 8㎏이 최상품(특) 기준 평균 경락가가 25ㆍ26일 3만544원으로 지난해보다 20~30% 하락했다.
전국 최대 참외 주산지인 경북 성주 지역 농가도 상황은 비슷하다. 성주참외의 2021년 기준 면적(3,421㏊)은 전국 74%이고 생산량(18만1,462톤)은 91%에 달한다. 참외재배의 '달인'들이 모인 성주지만 올해 같은 이상기후급 날씨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경북도농업기술원 등에 따르면 올 들어 참외 생산량은 평년보다 30% 정도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일부 농가는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물참외’로 불리는 발효과가 급증, 출하량이 절반도 안 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생산량은 지난해 동기보다 30% 감소했지만 가격은 평년보다 15~20% 정도, 지난해보다 10% 정도 높은 수준이다. 농가 소득 감소로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참외재배 경력 30년차인 이명화(64ᆞ성주군 선남면) 다온농장 대표는 “성주 전체로 봤을 때 현재 달린 참외가 없어 4월20일 정도까지는 생산량이 크게 줄 것으로 보인다”며 “가격이 폭등하면 수요가 급감하기 때문에 생산량 감소로 참외값이 오르는 것은 농민들에게도 달갑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참외 수박뿐만 아니라 딸기 토마토 등 과채류 시설재배작물 대부분이 일조량 부족에 따른 착과율 저하, 기형과 증가 등의 피해가 컸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겨울철 강수량은 전국 평균 236.7㎜로 평년(89㎜) 대비 270.8%로 기상 관측 이래 역대 최고였다.
고대환 경북도농업기술원 기술보급과장은 “날이 흐리면 하우스 내 습도가 높아지고, 벌이 움직이지 않아 수정이 안 된다”며 “어렵게 수정이 되더라도 기형이 되거나 광합성을 하지 못해 제대로 크질 못한다”고 말했다. 이상 기온, 기후변화로 예상치 못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일조시간 피해에 대한 보상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운학 함안군 농업기술센터 원예유통과 계장은 “일조시간 부족 피해는 원예시설 농작물재해보험 약관상 ‘기타 자연재해’로 분류돼 상당히 보수적으로 보상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상기온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만큼 농작물 재해보험에 일조량 부족을 명시하고, 보상률도 현실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