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열광하고 가상아이돌은 "성대결절"...'AI 극복 세계관'의 역습

입력
2024.03.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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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구현될 수 없는 몸" '피지컬: 100' 시즌2 환호
"과소평가됐다" 빅데이터로 미래 가능성 축소 반발
'파묘' '삼체' 흥행 공통점은 '초(超)과학'
'불로장생' 거부하는 가상아이돌
딥페이크 등 AI 두려움 영향도

넷플릭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피지컬: 100' 시즌2의 첫 게임은 무동력 트레드밀(러닝머신) 달리기로 시작된다. 트레드밀이 계속 작동하게 하려면 쉼 없이 뛰어야 하는 만큼 모터로 작동하는 러닝머신에서 달리는 것보다 더 높은 근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믿을 건 오로지 몸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땀을 비 오듯 흘리는 100명의 도전자를 통해 '몸의 숭고함'이 부각된다.



'인공지능(AI)으로 구현한 몸이 아니다. 출연자의 실제 몸이다.'(@Ianf****) 지난 19일 '피지컬: 100' 시즌2가 공개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영어로 이런 글과 함께 도전자의 몸을 캡처한 사진이 올라왔다. 최첨단 기술로도 모방할 수 없는, 생존에 최적화된 단단한 몸에 대한 감탄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서바이벌 콘텐츠를 즐기는 시청자는 주로 20, 30대다. 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몸'에 열광하는 건 '기계로든, 사람으로든 쉬 대체될 수 있다'는 현실 속 생존의 불안과 맞물려 있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챗GPT 등 AI로 '생각도 복제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 청년들이 '피지컬: 100' 시즌2 도전자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투혼을 보며 대체될 수 없는 인간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생각과 달리 복제될 수 없는 몸"

AI시대의 반작용을 지렛대 삼아 '피지컬: 100' 시즌2는 이달 21일부터 25일까지 넷플릭스 영어·비영어권 통틀어 시리즈 부문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주목받는 건 몸으로 한계를 뛰어넘고 고정관념을 부수는 도전자들이다. 여성 격투기 선수인 심유리는 "'강한 사람이랑 싸워 이겨보고 싶었다"며 자신보다 체중이 20㎏은 더 나가 보이는 남성을 대결 상대로 먼저 지목하고 제압해 화제를 모았다. 시청자들은 "(내가) 과소평가됐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도전자들의 각오를 SNS로 퍼 나르며 공유했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AI로 과거의 결과와 현재의 상태만을 토대로 미래를 단정적으로 예측해 청년의 가능성과 잠재력이 축소되는 데 대한 반감이 '피지컬: 100' 시리즈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는 해석도 나온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AI가 그간의 데이터들을 학습해 인간 대신 최적화된 판단이나 의사결정을 내리는 스마트 사회에 대한 기대가 커지지만, 인간의 삶엔 과거와 현재만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며 "'피지컬: 100' 시리즈의 인기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은 열망의 반영"이라고 분석했다.


'파묘' '삼체' 흥행의 평행이론

'AI 세계관'을 거스르는 콘텐츠의 인기는 세계적 추세다. '파묘'는 무속을 소재로 한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국내에서 1,000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고, 밤하늘이 난데없이 전구처럼 깜빡이는 미스터리가 펼쳐지는 미국 드라마 '삼체'는 25일 기준 77개국 넷플릭스 시리즈 부문 1위를 휩쓸었다. 두 작품은 초(超)과학을 소재로 삼았다. AI로 수치화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반(反)AI, 혹은 AI 극복의 세계관'을 다룬 이야기가 세계 대중문화 시장을 들썩이게 하는 것이다. '파묘'의 장재현 감독은 "숫자와 과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그 외의 보이지 않는 가치가 너무 홀대받는다는 생각에" '사바하'(2019) '검은 사제들'(2015) 등 초과학적 소재의 영화를 잇달아 만들었다고 밝혔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AI로 재현할 수 없는 게 바로 (인간 등 동물의) 감각"이라며 "감각을 일깨우는 체험 공간인 팝업 스토어가 갑자기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AI 세계관을 거스르는 콘텐츠 소비 흐름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현상을 바라봤다.


"회복 시간 필요"한 가상아이돌의 등장

추앙받던 'AI 세계관'도 더 이상 창작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가상 아이돌그룹 플레이브는 'AI 세계관'을 부순다. 기획사 블래스트는 지난 21일 "(리더인) 예준이 최근 성대결절 초기 진단을 받았다"며 "건강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하고, 회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당분간 플레이브 일정에서 예준의 활동을 최소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플레이브는 멤버 5명의 '본체'(사람)는 따로 있고 이들을 형상화한 2D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활동한다. 성대결절로 활동 자제에 나선 가상 아이돌의 등장이라니.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가상 아이돌그룹의 인간적인 모습 부각으로 팬덤과의 연대와 교감을 강화하려는 행보"라고 바라봤다. '불로장생'을 정체성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딥페이크 등의 기술로 소름 끼치게 사람과 비슷하게 재현된 AI가 초상권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AI 활용 초정밀 CG 자제도

AI 활용으로 컴퓨터그래픽(CG)이 고도로 정교화되고 있는 제작 추세를 역행하는 흐름도 감지된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에선 정체불명의 기계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닭강정으로 변한 민아(김유정)가 닭강정 모양의 탈을 쓰고 등장한다. 외계인은 보라색 잠수복을 입은 것처럼 CG로 투박하게 그려졌다. '닭강정'의 이병헌 감독은 "모든 시각효과를 원작의 정서대로 만화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연출 배경을 들려줬다. AI를 활용한 정교한 CG 작업을 자제한 이유다. 성상민 평론가는 "'용균이(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산업재해 희생자 김용균)를 만났다' 등 일부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AI를 활용한 가상현실(VR)로 고인을 정교하게 재현하는 것보다 사고 환경 재현에 집중해 사회적 문제를 부각하는 식의 변화도 이뤄지고 있다"고 달라진 흐름을 짚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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