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3월 27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 8번 부두에 접안한 일본 여객선 닛타 마루호에서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만 29세 일본 청년이 내렸다. 여권에 적힌 이름과 달리 그의 본명은 요시카와 다케오(1912~1993)였고, 공식 직책은 신임 부영사이었지만 실제는 제국 해군 정보국이 파견한 스파이였고, 임무는 진주만 미 태평양 함대 기지 정보 수집이었다.
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1933)한 그는 순양함 등 해상 근무를 거쳐 1934년 말 해군 조종사 훈련을 받던 중 심각한 위장 질환으로 과정을 중퇴한 뒤 36년 예편했다. 엘리트 군인을 꿈꾸던 그는 자살을 생각할 만큼 실의에 빠졌지만 이듬해 해군 정보국에 차출돼 미 해군 정보 분야 전문가로 양성됐다. 1940년 외무부 하급 외교관이 된 것도 해군 당국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영사관 동료들에게도 철저히 신분을 은폐한 채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군항과 비행장 동향, 항공모함 등 전함들의 입출항 날짜, 정박 위치 등을 파악하고 권역별 방어 태세 등 정보를 수집해 외무부를 통해 해군 사령부에, 연말 진주만 공습 직전까지 보고했다. 그의 암호문은 여러 차례 미국 정보당국에 포착됐지만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취급된 것으로 훗날 드러났다.
개전 직후 그도 일본계 미국인들과 함께 격리 수용됐다가 1942년 8월 외교관 포로교환을 통해 귀국했다. 요시카와는 전시 해군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45년 패망 직후 승려로 위장해 도피했고, 그런 사정 탓에 내내 첩보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보험 외판원 등으로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스파이 이력이 알려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주민들은 전쟁을 부추겨 패전의 비참을 겪게 한 장본인으로 그를 원망했다. 한편 미국은 뒤늦게 그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전시 일본계 시민 격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그의 존재를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