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식품업계를 향해 연일 가격 인하를 주문하고 있는 가운데 라면업계 투 톱인 농심과 삼양식품이 "연내 라면 인상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두 라면 회사가 가격을 내리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정부 압박을 감안해 절충안을 내놓은 셈이다.
신동원 농심그룹 회장은 22일 서울 동작구 농심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밀가루 가격이 내려가고 있는데 라면 가격 인하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밀가루 한 품목만으로 라면 가격 조정은 쉽지 않고 현재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올해 인상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삼양식품 역시 이날 본보에 "올해 라면 가격 인상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전했다. 라면업계 선두 업체인 농심, 삼양식품이 올해 라면값에 대한 방향성을 공식적으로 밝힌 건 처음이다.
정부는 최근 국제 곡물가 인하를 내세워 밀가루, 식용유 가격을 내려달라고 식품업계에 요청하고 있다. 그러자 국내 최대 식품회사 CJ제일제당이 다음 달 1일 가정용 밀가루 가격을 낮추기로 했다.
이에 더해 밀가루, 식용유를 부재료로 활용하는 라면, 과자 업체 역시 정부 사정권에 들어갔다. 다만 라면업계는 CJ제일제당과 다르게 '인상 없음'으로 대처했다. 라면값을 내리기 쉽지 않다는 면만 부각했다간 자칫 정부의 시선이나 여론이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감안해 내놓은 묘수로 풀이된다.
신 회장 발언에서 보듯 농심, 삼양식품 등은 원가의 10% 정도 차지하는 밀가루 가격 인하로 라면값을 낮추긴 어렵다고 본다. 오히려 건더기에 들어가는 채솟값, 인건비, 전기료 같은 공장 운영비 등의 다른 라면 원가 요인은 올랐다고 항변한다. 밀가루만 봐도 제분업계가 가정용 밀가루 가격을 내린 반면 라면 회사에 적용하는 기업 간 거래(B2B)용은 변동 없다.
라면업계는 지난해 7월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등이 제품가를 4, 5% 내린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추가 인하 여력이 크지 않다는 점도 강조한다. 다만 이날 신 회장은 '다양한 변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단서를 달면서도 "검토는 해보겠다"며 라면값 인하에 대해 아예 문을 닫지는 않았다.
신 회장은 경기 평택시 포승, 부산시 녹산에 확보한 부지 중 한 곳에 수출 라면 공장을 짓겠다는 구상도 처음 발표했다. 농심은 2007년 부산 녹산 공장을 마지막으로 미국, 중국 등 해외 공장 건설로 눈을 돌렸다. 국내 공장 신설은 신라면 등 해외 시장에서 K라면이 갈수록 인기를 얻고 있자 물량을 맞추기 위한 차원이다. 농심(3조4,106억 원)은 물론 삼양식품(1조1,929억 원)은 해외 시장 공략에 힘입어 지난해 역대 최대 매출을 올렸다.
일부 소비자단체에선 이런 라면 회사의 호실적도 라면값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에 활용하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식품은 대체로 1,000원짜리를 팔면 50원을 남겨 영업이익률 5% 내외에 불과한데 인건비가 많이 들고 가격 자체도 낮기 때문"이라며 "영업이익률이 높은 자동차, 반도체 가격을 인하하라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지 않나"라며 답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