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말 2아웃 상태입니다.”
의미심장했다. 자신의 판세를 야구 정규이닝 마지막인 9회말 1타자만 남겨둔 순간에 빗댄 분위기에서부터다. 듣기에 따라선 현역 생활 마무리까지 염두에 둔 사전 포석으로도 읽힐 수 있어서였다. 불과 며칠 전, 세계 대회 2연패와 더불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한 1인자의 겸손함으로 치부하기엔 표현 수위가 높았다. 올해로 15년차에 접어든 ‘여자 바둑 최강자’ 최정(28) 9단에게 19일 ‘반상(盤上) 인생 복기’를 요청하자, 돌아온 답변이 그랬다. 이달 10일 열렸던 ‘센코컵 월드바둑여자최강전 2024’ 결승에서 일본의 스즈키 아유미(41) 7단에게 승리, 지난해에 이어 2연패한 긍정적인 기류에선 벗어난 궤도였다.
최 9단의 반상 족적은 독보적이다. 우선, 이미 보유한 ‘오청원배’와 이번에 가져온 ‘센코컵’을 포함, 현재 세계 여자 바둑의 양대 타이틀이 모두 최 9단 소유다. 국내 기전까지 포함되면 그의 우승 트로피는 31개(세계대회 우승컵 9개 포함)로 급증한다. 통산 765승 341패(승률 69.17%)를 기록 중인 그는 국내에선 무려 124개월(올해 3월 기준) 연속 1위 자리만 고집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도 절대권력을 행사 중인 최 9단에겐 무의미했던 셈이다. 최 9단의 최다승과 최고승률은 물론이고 최다연승(20승) 및 누적상금(29억3,200만 원) 등도 국내 여자 바둑계에선 비교불가다. 특히 지난 2022년엔 여자 기사로선 처음으로 세계 메이저 기전인 ‘삼성화재배’ 결승까지 진출, 신진서(24) 9단에게 패했지만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처럼 초장기 집권 중인 최 9단이 자신을 냉정하게 진단한 까닭은 뭘까. 실마리는 그의 센코컵 우승 소감에서 감지됐다. “이번 대회는 매판 다 어려웠다”고 운을 뗀 최 9단은 “많이 불리했던 중국의 위즈잉(27) 9단과 4강전을 이기긴 했어도 많은 것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최대 라이벌인 중국 랭킹 1위 위즈잉 9단에겐 중반 무렵 한때 인공지능(AI) 승률 그래프가 2%대까지 추락할 만큼 고전했다. 세계 대회 무게감에 대해선 누구보다 익숙한 최 9단 이력을 감안하면 다소 어색했지만 센코컵 직전, 보여왔던 그의 행보가 공감지수를 높여줬다.
최 9단은 지난해 12월말 열렸던 ‘제7회 해성 여자기성전’에서 차세대 주자로 점찍힌 김은지(17) 9단에게 우승컵을 내준 이후, 사실상 바둑과 의도적인 거리 두기에 착수한 상태다. 최근 몇 년간 거듭된 강행군에서 비롯된 극도의 피로감이 ‘번아웃’을 가져왔다는 자가 진단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2019~23년 사이 그의 누적 대국수는 495국으로, 매년 100국(평균 승률 71%)에 가까운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이는 매주 2경기에 나선 꼴로, 정상급 남자 프로기사들에게도 버거운 스케줄이다. 최 9단은 “김 9단에게 패배하고 많이 괴로웠고 아팠지만 제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20대 후반으로 접어든 길목에선 ‘에이징 커브(시간 흐름에 따른 기량 저하)’ 컨트롤 능력 또한 1인자의 필수 요건이란 사실을 체득했단 얘기로 들렸다. 당장, 최 9단이 올해 대국(4승 1패, 3월 19일 기준)을 전년 동기(13승 11패) 대비 5분의 1 수준으로 줄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태함에 대한 경계심은 기본이다. 최 9단은 “인간의 속성상 태만한 순간은 찾아올 것”이라면서도 “이걸 빠르게 깨닫고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해를 재정비의 해’로 정한 최 9단은 또 다른 변신도 꾀했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다’란 말도 있잖아요. 앞으로 제 바둑인생에도 어떤 길이 열리게 될지 모릅니다.” 반전 모색을 향한 그의 마음가짐에선 강한 승부욕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