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장의 사진이 때로는 100매의 글보다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미처 보지 못한 사회와 제도의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70년 역사에서도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사진 기자들이 포착해낸 수많은 장면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972년 겨울 ‘대화재 현장’ 사진은 그 대표 사례로 꼽힌다.
당시 6세 꼬마에게 ‘기적의 소녀 조수아’라는 이름을 얻게 만든 특종 사진은 53명이 희생된 시민회관 대화재(1972년 12월 2일) 현장에서 찍혔다.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에서는 MBC 개국 11주년 기념 ‘남녀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렸다. 안전사고 대비 태세가 현저히 약했기 때문일까. 공연 폐막 직후 무대장치 합선으로 불이 나면서 인파가 탈출구로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입사 3년 차 한국일보 박태홍 기자는 많은 관람객이 한꺼번에 탈출해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조수아(당시 6세)양의 왼발이 4층 회전 창문틀에 걸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단독 촬영했다. 그 직후 조수아양은 사다리로 접근한 이영주 소방관에 의해 구출됐다. 몇 개월 뒤 세계보도사진전에서 은상을 받은 박 기자의 사진은 사고 다음 날인 3일 자 한국일보에는 게재되지 못했다. 언론 검열을 하던 당국에 의해 “불안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실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이 빛을 본 건 정작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되면서다. 한국일보의 일본 측 제휴 언론사 요미우리신문이 사진을 내보냈고, 이를 AP통신이 퍼뜨리면서 한국만 빼고 전 세계 언론에 소개됐다. “이 소녀가 과연 살아났느냐”, “구출한 사람이 누구냐”는 일본 독자들의 문의가 국내로 빗발쳤다. 조양이 입원했던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으로도 일본 독자들의 위문편지가 잇따랐고 직접 방문하는 사례도 있었다.
일본 매체를 돌아 유명해진 이 사진은 결국 세계보도사진전에서 은상을, 한국에서는 제6회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생사가 걸린 한계상황은 사진에 찍힌 조양, 사진을 찍은 박 기자, 조양을 구출한 이 소방관의 오랜 인연으로 발전했다. 세 사람은 그 이후에도 줄곧 가족 이상의 인연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