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로열발레단,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발레단,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POB), 노르웨이 국립발레단, 체코 브르노 국립발레단, 그리고 한국의 국립발레단.
영국 로열발레단이 다음 달 10, 11, 13일 런던 린버리시어터에서 여는 갈라 공연에 참여하는 9개 발레단 목록의 일부다. 한국 국립발레단이 아시아 발레단으로는 유일하게 세계 유수의 발레단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이 공연은 로열발레단의 연례행사인 '인터내셔널 드래프트 웍스'. 신인 안무가 발굴을 위한 쇼케이스다. 한국 국립발레단의 출품작은 이영철 발레마스터가 안무를 맡은 '계절: 봄'이다. 국립발레단이 2015년부터 매년 무용수들이 직접 안무한 작품을 선보이는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통해 2019년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가야금 연주와 노래를 더해 봄날의 정취를 표현한다.
'K공연예술'이 4월 세계 무대를 달군다. 클래식 음악, 발레, 뮤지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한국 예술가들의 공연이 공연예술 메카인 유럽과 미국 무대에 잇따라 오른다.
K공연의 질주를 선도하는 건 클래식 음악계다. 연초 미국 뉴욕 카네기홀을 뒤흔든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조성진은 4월엔 영국으로 무대를 옮긴다. 임윤찬은 4월 8일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조성진은 4월 10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소프라노 박혜상은 4월 24일 뉴욕 필하모닉의 차기 음악감독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는 뉴욕필 봄 갈라 콘서트에 출연한다. 지난 2월 뉴욕필 데뷔 무대를 가진 지휘자 김은선은 4월 18~20일 세계 최정상의 베를린필을 지휘한다.
한국 클래식의 강세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국제 콩쿠르 입상 소식이 쏟아지며 K클래식 돌풍을 분석한 벨기에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을 정도다. 최근엔 연주자들이 전문 무대에서 유료 관객에게 실력을 입증해 보인다는 점에서 한층 진일보했다. 임윤찬의 위그모어홀 리사이틀은 지난 1월 회원 우선 예매 단계에서 매진됐다. 지난 2월 임윤찬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데뷔 연주에 참석한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는 "낮 공연까지 전 회차가 매진돼 보스턴 심포니홀 관계자조차 '임윤찬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며 "한국 음악가들은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수준을 넘어 예술 본고장 미국과 유럽에서 압도적 현상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새 시즌 라인업을 발표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필하모닉은 주요 프로그램에 '서울 페스티벌'(2025년 6월 3일, 6~8일)을 포함시켰다. 작곡가 진은숙이 기획하고 피아니스트 김선욱,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첼리스트 한재민 등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총출동하는 프로그램이다.
발레는 한국 무용수들이 해외 유명 발레단의 간판으로 활동하는 데 이어 안무까지 주목받게 된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번 로열발레단의 국립발레단 초청은 2022년 예술의전당 방문 일정 중 국립발레단을 찾은 엠마 사우스워스 로열발레단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국립발레단은 빠듯한 공연 일정으로 당시엔 고사했으나 올해 로열발레단이 재차 제안해 참여를 결정했다. 이번 공연에 대해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은 "세계 발레계 동시대 안무가들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KNB무브먼트 시리즈를 국제 프로젝트로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뮤지컬은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브로드웨이 역사상 한국인 첫 단독 리드(총괄) 프로듀서로 나선 '위대한 개츠비'가 4월 25일 브로드웨이 시어터에서 공식 개막한다. 일본, 중국 등에서 한국 뮤지컬의 라이선스 공연은 종종 있었지만 영미권의 문턱은 높았다. 오는 6월에는 제작사 라이브의 뮤지컬 '마리 퀴리' 영어판이 영국 런던 채링 크로스 시어터에서 막을 올린다. 한국 창작 뮤지컬 최초의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이다.
K공연이 주목받는 건 한국식 영재교육 시스템의 성과가 받쳐 주는 데다 세계 공연계가 새로운 것을 찾아 아시아 콘텐츠로 눈을 돌리는 데 따른 것이다. 세계 공연계 관객 규모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만큼 회복되지 않았다. 개성 있는 콘텐츠 수혈로 돌파구를 모색 중인 해외 주요 공연 시장 수요와 맞물려 한국 공연의 세계 무대 진출은 꾸준히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대중문화를 잇는 포스트 한류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유통 플랫폼이 확장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무가 이영철은 "국내에서도 가능성 있는 발레 안무가가 막 나오기 시작한 만큼 작품이 외부에 소개될 기회가 많아져야 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연 한예종 교수는 "한국의 창작자와 예술가들은 세계적 반열에 올랐지만 공연예술 유통 플랫폼은 여전히 유럽과 미국이 장악하고 있다"며 "뛰어난 한국 예술가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유능한 기획 인력을 보유한 세계적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