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가스 다배출 산업인 철강산업을 향한 탄소중립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철강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국내 기업 다수는 저탄소 ‘그린철강’을 활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기업들의 수출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연구하는 비영리단체인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은 18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한국 철강산업의 그린철강 전환’ 보고서를 공개했다. 국내 철강 생산기업 50곳과 소비기업 150곳을 대상으로 그린철강 관련 인식을 조사한 첫 보고서다. 그린철강은 철광석에서 산소를 분리할 때 석탄(코크스) 대신 수소를 사용해 탄소 배출량을 대폭 줄인 제품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철강 소비기업 중에는 단 한 곳만 그린철강 구매 목표를 세웠고, 목표 수립 계획이 있다는 기업도 14곳에 그쳤다. 조사 대상 기업의 90%(135곳)가 그린철강을 쓸 계획이 없는 셈이다. 향후 구매 의향이 있다고 답한 기업은 8곳이었다. 생산기업은 그린철강 생산 목표를 수립한 곳이 전혀 없었다. 다만 42%(21곳)는 ‘향후 생산 목표를 수립하겠다’고 응답했다.
철강산업은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의 14.2%, 전 세계 배출량의 7%를 각각 차지한다. 철광석 제련에 사용하는 코크스가 대량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린철강은 이 과정을 ‘수소 환원 제철’ 방식으로 대체하는데, 특히 재생에너지로 만든 그린수소를 활용해 탄소 배출량을 0에 가깝게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해외 유수 철강 기업들은 정부 지원하에 수소 환원 제철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포스코가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자체 수소 환원 제철 기술인 하이렉스(HyREX)를 개발 중이며 2027년 시험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기업들이 앞다퉈 그린철강 조달에 나서는 이유는 국제 탄소무역장벽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실시해 탄소관세를 부과할 예정이고, 미국은 철강을 비롯한 수입 제품에 탄소세를 부과하는 청정경쟁법을 추진하고 있다.
조사에 참여한 기업들도 이 같은 무역장벽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린철강 생산 목표를 수립하겠다고 밝힌 기업에 이유(복수 응답)를 물었더니, 63%가 CBAM 등 대외무역 환경 변화에 대응할 필요를 느낀다고 응답했다. 58%는 해외 고객사로부터, 47%는 국내 고객사로부터 생산 요구를 받았다고 답했다. 철강 소비기업 역시 대외무역 환경 변화(75%)와 국내 고객사 요구(63%)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린철강 구매 의향이 있다고 답한 8개 철강 소비기업 중 5곳은 수출경쟁력에 민감한 자동차 업종이었다.
기업들은 그린철강 전환이 미래 경쟁력에도 중요하다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중요도를 5점 척도(전혀 중요하지 않음 1점~매우 중요함 5점)로 평가했을 때 철강 소비기업은 3.57점, 생산기업은 3.72점이었다. 그럼에도 그린철강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용이었다. 생산기업의 78.0%가 생산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금 조달이 어렵다고 답했고, 소비기업 역시 61.3%가 일반 철강보다 비싸 조달이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국내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정부 차원에서 초기 시설 투자와 시장 확대를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나현 KoSIF 선임연구원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그린철강 수요 촉진의 열쇠”라며 "공공조달 확대로 수요를 촉진하고, 생산시설 투자에 대한 재정 지원과 그린수소 및 재생에너지 확대로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