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과 사위들이 제사음식 다 만든다고?" 아시아 흥분시킨 '신데렐라남'

입력
2024.03.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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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물의 여왕'으로 본 K드라마 변화 
① '신데렐라남' 성역할 반전 
해외시청자 "가부장 문화 깨는 스토리 속 시원" 
여성 작가와 PD...로맨틱 코미디 공식 달라져
② 친근해진 재벌 
젊은 세대, 재벌에 반감 덜해...미화는 경계를






'제사음식 준비를 며느리 대신 사위들이 한다. 이런 신선한 장면이 반갑다.'(@for_n****, Lakh****, sami****)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9일 첫 공개된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이런 반응들이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로 줄줄이 올라왔다.

배경은 이렇다. 드라마에선 남성 10여 명이 앞치마를 두르고는 전을 부치고 마늘종과 맛살로 꼬치를 만들며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 2분여 동안 펼쳐진다. 이들은 재벌가인 퀸즈그룹 사위들로, 사위들이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게 이 집안의 풍습이다. 퀸즈그룹 홍 회장의 맏손녀 사위로 서울대 법대 출신인 백현우(김수현)는 고사리를 제기에 담으며 "이게 무슨 재능 낭비인지"라고 구시렁댄다. 제사 준비에 녹초가 된 사위들은 "홍씨 제사인데 준비하는 사람은 백씨, 조씨, 유씨" "뼈 빠지게 전 부친 건 우린데 절하는 건 지들끼리" "차례상 (준비만) 끝내면 집에 보내준다더니 '막내 당숙 오면 가라'고 한다" 등의 푸념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명절증후군으로 가슴이 답답해진 백현우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처가 식구와 한집에 산다. 1년 365일 제 시간이 없다"며 하소연한다.

한국의 며느리들이 한결같이 겪는 고충들로, 사위들을 통해 '미러링'(Mirroring·거울처럼 상대방의 언행을 따라해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것)의 방식으로 가부장제의 차별을 비꼰 것이다. 가부장 문화의 마지막 남은 잔재라 여겨지는 제사·차례상 준비를 TV 드라마에서 남성들이 도맡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이례적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여성을 주체적으로 그리는 것을 넘어 가부장제의 핵심을 풍자했다는 점에서 통쾌함을 안겨줬다"고 평했다. '눈물의 여왕'은 '사랑의 불시착'(2019)으로 한류에 다시 불을 지핀 박지은 작가가 대본을 썼고, 세 자매의 성장기를 장르물처럼 다룬 '작은 아씨들'(2022)로 주목받은 김희원 PD 등이 연출했다. 여성 창작자들이 대중문화 주류에 우뚝 서며 변화를 이끌었다.


"아버지와 함께 보며 힘 얻어" 해외로 퍼진 나비효과

가부장제에 억눌려 지낸 한국 며느리들도 아니고 외국 시청자들이 K드라마의 제사 에피소드에 열광한 이유는 뭘까.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눈물의 여왕'을 봤다는 인도네시아 시청자 린탕(22)이 한국일보에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청년 결혼 비율이 떨어지고 있어요. 한국처럼 가부장적 관습이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거든요. 아직도 많은 여성이 '남편과 남편의 가족을 섬기고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요리를 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 살고 있고요. 아내와 며느리로서 고단하게 사는데 (우리처럼) 가부장제가 여전히 강한 나라가 있다는 데 묘한 동질감을 느꼈어요. K드라마를 통해 가부장 문화에 대해 가족과 얘기하는 게 속 시원하기도 했고요. 어떤 면에서 '눈물의 여왕'이 교육적으로 다가왔다랄까요, 하하하." 인도네시아를 포함해 한국, 일본 등 가부장제의 위력이 여전히 강력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눈물의 여왕'은 이달 11일부터 16일까지 넷플릭스 드라마 부분 1위를 달리고 있다.






"눈물 안 나게 해 주겠다"는 여주인공

'눈물의 여왕'은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도 비튼다. 우선 '백마 탄 왕자'가 없다. 퀸즈그룹 이사인 홍해인(김지원)은 헬기를 타고 지방으로 찾아가 백현우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태양의 후예'(2016)에서 특전사인 유시진(송중기)이, '킹더랜드'(2023)에서 재벌2세인 구원(이준호)이 헬기를 타고 연인에게 날아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과 정반대의 성역할이다. "절대 당신 눈에서 눈물 나게 안 해"라며 불안해하는 연인의 마음을 보듬는 것도 홍해인이다. 그간 '킹더랜드' 등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 재벌 캐릭터를 남성 배우가 주로 맡아 '왕자님 판타지'를 불러일으켰다면, '눈물의 여왕'에선 재벌로 나오는 여성 배우가 남성에게 신분 상승 기회를 제공한다. '신데렐라'를 남성 버전으로 다시 쓴 셈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로맨스 판타지 주인공의 성별 전복을 비롯해 '신데렐라가 돼도 행복하지 않다'는 스토리로 또 한 번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뒤집었다"며 "뻔한 이야기에 블랙 코미디 같은 웃음을 준 게 인기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자식 무서워하고 범죄 소탕하는 재벌의 등장

재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K드라마의 변화도 감지된다. 퀸즈그룹 부모는 딸에게 쩔쩔맨다. '재벌집 막내아들'(2022) 등 재벌가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권위적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자식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방송 중인 SBS 드라마 '재벌X형사'에서 형사인 진이수(안보현)는 재벌가 일원이기에 보유한 인맥 등을 동원해 범죄를 소탕한다. '눈물의 여왕'에서 홍해인은 시아버지의 이장 선거를 물량공세로 돕는다. 영화 '베테랑'(2015) 등에서 '갑질'을 하고 버럭 화만 내던 재벌은 K드라마에서 친근하게 그려지고 서민의 일상까지 파고든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정경유착 등 비리와 특혜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고 자라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기성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 세대는 재벌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덜한 데 따른 변화"라고 달라진 흐름을 짚었다. 현실에서 재벌 총수를 "형"(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라 부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시민에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쉿' 동작(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한 게 화제를 모은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이런 흐름 속에 재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최근 보름 새 '로얄로더'를 비롯해 세 편이 줄줄이 공개됐다. 재벌3세와 평범한 회사원의 사랑과 위기, 친족들이 모두 모여 선대 제사를 지내는 현실 속 재벌가의 모습이 '눈물의 여왕'에 등장해 몰입을 키운다. 이 드라마를 통해 재벌 이야기가 세계로 퍼지면서 SNS엔 새삼 'Chaebol(재벌)'이란 단어가 들어간 게시물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드라마에서 재벌가가 인간적이고 친숙한 모습으로 연출되면서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 문제와 약탈적 경영의 폐해들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서진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