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과 왕이 핍박해도...낮은 자리 이솝들의 서러운 삶은 이야기로 살아남았네

입력
2024.03.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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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이솝이야기'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이야기는 인류가 등장하며 생겨났고, 사람들은 대부분 이야기를 좋아한다. 장소나 인물에 서사가 부여될 때 더욱 공감하고 애정을 갖는다. 삶 자체가 무수한 이야기의 총합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이야기인 성경이 등장하기 전엔 '이솝 우화'가 있었다. '이솝 우화'는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사모스인 이아도몬의 노예 아이소포스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솝은 아이소포스(Aisopos)의 영어식 표현. 삶의 지혜를 담은 우화 모음집인 이솝 우화는 아이소포스 혼자 지은 것은 아니다. 구전돼 온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아마도 아이소포스는 이야기를 재밌게 구술하는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뮤지컬 '이솝이야기'는 이솝 우화 작가와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프를 취해 상상력을 발휘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작품으로,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의 연출가 서윤미가 작, 작곡, 연출을 맡았다.

이야기 만들며 가까워지는 다나에와 티모스

고대 그리스 사모스에 사는 파빌로스의 딸 다나에와 이 집의 노예 티모스가 주인공. 일찍 어머니를 여읜 다나에는 유모 안나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는데 안나의 실수로 등잔 기름이 얼굴에 흘러 볼에 붉은 상처를 입는다. 화가 난 파빌로스는 안나의 아들 티모스에게 같은 벌을 내린다. 안나는 손으로 아들의 볼을 감싸 파빌로스의 눈을 속이고 화를 면한다. 시간이 흘러 숙녀가 된 다나에는 아버지의 엄격한 보호 아래 집 안에 갇혀 티모스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며 지낸다. 어느 날 티모스는 다나에에게 바다를 보여주려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파빌로스에게 들키고 아테네에 노예로 팔려간다.

사모스섬에서의 다나에와 티모스의 어린 시절, 우정을 쌓는 과정,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놀이 등 전반부는 다소 느슨하게 진행된다. 티모스가 다시 다나에에게 돌아오기까지 다양한 관문을 이겨내는 후반부는 오디세우스의 귀향 여정처럼 흥미진진하다.

새로운 주인인 상인 시타스는 티모스에게 제안한다.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반푸무스왕에게 기분이 좋아지는 붉은 열매를 팔면 노예 신분을 풀어주겠다는 것. 반푸무스왕은 타고난 이야기꾼인 티모스를 3개월간 곁에 두고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왕은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면서도 그 속에 신들을 모욕하고 왕을 비웃는 독이 들었다고 여긴다.

티모스가 고난에 빠지는 결정적인 장면에서 신들이 등장한다. 다나에와 티모스의 바닷가 산책이 발각되는 것이나 반푸무스왕이 티모스의 이야기에서 독을 발견하는 것이 행복을 시샘한 불행의 신이 방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처럼 티모스의 고난이 신의 질투로 인한 것인 듯 꾸민다. 그러나 고난의 진정한 원인은 주인이 노예에게, 왕이 상인에게 위계관계의 불합리한 폭력을 가한 것이다.

'이솝 우화' 차용으로 색다른 재미

‘이솝이야기’는 반원형 아레나 무대를 활용해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배우들은 이야기 전달자인 정령 위스퍼이면서 다양한 역할을 함께 맡는다. 다나에를 맡은 배우가 시타스 역을 맡고, 파빌로스는 티모스를 돕는 나이 많은 노예 페테고레 할아버지 역을 병행한다. 티모스를 제외한 위스퍼들은 노예가 됐다가 상인이 됐다가 다시 왕의 자녀들이 되는 등 이야기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의 인물들로 변한다. 연극과 이야기의 경계를 적절히 넘나드는 전개다.

해와 바람 이야기, 양치기 소년, 여우와 신 포도 등 다양한 이솝 우화가 차용된다. 특히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극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익숙한 우화를 새로운 의미로 감상하게 하는 것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재미이다.

알고 보니 이솝은 이야기에 재능 많은 티모스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재주가 없었던 페테고레 영감이었다. 그러나 이솝이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이솝 우화가 누구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듯, 작품 속 이솝은 페테고레 영감만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 삶의 설움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거기서 위로받은 모든 이가 이솝이다. '이솝이야기'는 낮은 자리에 있는 진짜 이솝들의 이야기에 집중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음 달 14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블랙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