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물가 급상승이 이슬람 최대 명절 라마단(금식성월)까지 덮쳤다. 라마단 기간 낮 시간 금식하고 해가 지면 가족·이웃과 축제를 벌이며 음식을 나눠 먹는 게 전통이었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식량 가격 탓에 반강제적으로 단식에 나서야 하는 처지가 됐다. 종교 신념이 아닌 현실적 이유로 그 어느 때보다 ‘배고픈’ 라마단을 보내게 된 셈이다.
12일 AFP통신 등에 따르면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인도네시아와 이슬람이 국교인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요르단 등에서는 이날부터 라마단이 시작됐다. 약 29일에 걸친 라마단 기간 이슬람 교도는 동틀 무렵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음식은 물론 물도 입에 대지 않는다. ‘금식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해 신에게 가까이 가고, 가난한 이웃과 고통을 나눈다’는 게 라마단 취지다.
대신 이들은 해가 지면 지인을 초청해 ‘이프타르’라고 부르는 만찬을 즐긴다. 때문에 통상 이 기간이 되면 쌀, 육류, 채소 같은 먹거리 판매가 급증한다. 이론적으로는 금식을 하니 음식 소비량이 감소해야 하지만 낮 동안 억압됐던 식욕을 해소하기 위해 새벽과 밤에 더 많이 먹어 오히려 음식 소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해 왔다.
그러나 라마단을 기념하는 국가들은 한목소리로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고 말한다. ①식량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②예년보다 식량 구매 여력이 줄고 ③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저녁조차 배를 곯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게 현지 매체들의 설명이다.
예컨대 단일 국가로는 가장 많은 이슬람 신도(약 2억1,000만 명)를 보유한 인도네시아는 지난달 식품 물가 상승률이 8.47%로, 2022년 9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주식인 쌀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나 급등하면서 밥상 물가를 끌어올렸다. ‘두 개의 전쟁’이 부른 공급망 불안과 지난해 '엘니뇨(동태평양 해수면 온도 상승)'에 따른 쌀 생산량 감소가 겹쳤다.
인도네시아 필수 식재료로 꼽히는 닭고기, 고추, 설탕 가격도 10% 이상 올랐다. 이웃 국가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등의 상황도 비슷하다. 자카르타 시민 사리 얀티는 AP통신에 “음식과 관련된 모든 가격이 올랐다”며 “어떤 때보다도 어려운 라마단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산 곡물 의존도가 높은 북아프리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식량 물가가 30%나 뛰면서 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기 위해 하루 한 끼만 먹는 ‘반강제 금식’에 나섰다. 나이지리아 경제수도 라고스 시민 오오예미 셰리펜트 모지솔라는 AFP통신에 “식량을 살 여유가 없어서 라마단과 무관하게 일찌감치 단식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유엔은 라마단 기간 ‘심각한 식량 불안정’ 상태에 놓인 무슬림이 4,0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이 중 50만 명은 재앙적인 기아 상태에 놓였다고 판단했다. 코린 플라이셔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책임자는 “소득은 정체됐는데 물가가 치솟으면서 지역 전체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며 “식량 부족과 가격 상승으로 일정 기간 단식하는 라마단 종교 관습이 가혹한 일상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