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미국 자본으로 대만에 인접한 섬에 항구를 건설할 계획이다. 필리핀 측은 위기 상황 발생 시 대만에 있는 15만 필리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대만해협 코앞인 데다 남중국해로 향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인 까닭에 중국 견제용이란 해석도 나온다. 항구가 군사용으로 전용될 경우 필리핀과 중국 간 긴장은 물론 미중 갈등도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11일 일본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마리로우 카이코 필리핀 바타네스 제도 주지사는 9일 “주도(州都) 바스코가 위치한 바탄 섬에서 미국이 자금을 지원하는 항구 건설 계획이 진행 중”이라며 “위기 상황 발생 시 대만 내 필리핀 노동자 수용이 목표”라고 밝혔다. 바타네스 제도는 필리핀 최북단에 위치한 10개 작은 섬으로, 대만 남부에서 직선거리로 200㎞,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는 860㎞ 떨어져 있다.
카이코 주지사가 말한 ‘위기’는 중국의 대만 침공으로 해석된다. 대만에는 필리핀인 약 15만 명(지난해 말 기준)이 일하는 데, 유사시 이들을 가장 가까운 자국 영토로 우선 피신시키기 위해 항구를 개발한다는 얘기다. 그는 새 항구가 ‘민간항’이라고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군사·전략적 중요성이 크다 보니 중국 견제용이란 해석도 나온다. 바타네스 제도가 있는 바시해협은 서태평양과 남중국해를 오가는 상선과 해저 통신 케이블이 지나는 길목이다. 괌 기지를 출발한 미 공군 항공기와 해군 군함이 대만 해협에 이르는 최단 경로에 위치한 해상로이기도 하다. 미군과 필리핀군은 지난해 4월 바타네스 제도 인근에서 1만7,000명이 참여하는 발리카탄 연합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이 장소에 새 항구를 건설하려는 것은 전략적 요충지인 바시해협 장악력을 높이고 중국군을 감시하려는 포석으로도 읽힌다.
필리핀 정부도 이 지역에 병력을 늘리고 있는 만큼 항구가 군사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필리핀 해군은 지난해 10월 바타네스 제도 섬 중 하나인 마불리스에 부대를 창설했다. 또 필리핀 매체 래플러에 따르면 길버트 테오도로 필리핀 국방장관은 지난달 바타네스 제도에 주둔하는 병사 수를 늘릴 것을 명령했다.
‘새 항구’에 미군 접근권이 확대될지도 관심사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2022년 6월 취임 이후 미군이 사용할 수 있는 필리핀 내 항구 수를 늘리고 있다. 지난해 미군이 추가로 이용할 수 있게 된 필리핀 내 군사기지는 4곳에 달한다. 미군이 필리핀 내 군 기지 접근 권한을 확대하면 대만이나 남중국해에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즉각적인 작전 수행을 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대만해협에 군사적 긴장이 이어질 경우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바타네스 제도 역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바타네스 제도가) 다음 달 말 진행될 미국-필리핀 연례 합동 군사훈련 장소로 또다시 고려되고 있다”며 중국의 반발을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