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필리핀이 남중국해(서필리핀해)에서의 선박 운항 문제로 또 충돌했다.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 갈등이 격화하면서 상대를 겨냥한 발언 수위마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물론 호주, 일본 등 필리핀 동맹국이 중국을 향해 거친 언사를 쏟아내며 공세 수위를 끌어올리고, 중국은 책임을 미국에 돌리고 있어 역내 갈등이 더 광범위한 국제 분쟁으로 확산할 조짐마저 감지된다.
7일 필리핀 마닐라타임스 등에 따르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호주 정상회의 참석차 호주 멜버른을 방문 중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남중국해 갈등에 대해 작심한 듯 비판을 쏟아냈다.
전날 호주 공영방송 SBS와의 인터뷰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은 양국 갈등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결국 다윗이 승리했다는 점을 (중국에) 상기시키고 싶다”며 “어떤 외국 세력에도 영토 1제곱인치(in²)조차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공영 ABC뉴스 인터뷰에선 “필리핀과 중국 간 전면 갈등 가능성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고도 밝혔다.
이는 남중국해에서 계속되는 중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다. 지난 5일 중국 해안경비대 순찰선이 남중국해 세컨드토머스(중국명 런아이자오·필리핀명 아융인) 암초에서 보급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필리핀 선박에 물대포를 발사했다. 당시 필리핀 측 선박이 파손되고 승무원 4명이 다쳤다. 필리핀 외교부는 6일 주필리핀 중국대사관 관계자를 초치해 공식 항의했다.
지난해부터 중국 해경이 필리핀 선박에 공격을 가할 때마다 필리핀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다만 마르코스 대통령은 외교 관계를 의식해 공개석상에서 대(對)중국 비난 발언은 자제했다. 작년 12월 중국 측의 물대포 공격 이후 “중국의 침략이 주권 수호 의지를 강화시켰다”는 성명을 발표한 게 취임(2022년 6월) 후 처음으로 중국을 직접 겨냥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중국의 위협 강도가 높아지자 더 강경한 어조로 맞불을 놓고, 좀 더 직접적으로 충돌 가능성을 예고한 셈이다. 필리핀 매체 래플러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필리핀에서도 언론 인터뷰는 물론, 말라카낭궁(대통령 관저) 출입 기자들과 질의응답조차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점을 감안하면 해외 언론과의 일대일 대담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등 필리핀 우방국까지 가세하면서 중국-필리핀 영해권 문제는 확전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7일 호주와 아세안 정상들은 “남중국해 평화를 위협하는 일방적 행동을 멈추라”는 성명을 통해 한목소리로 중국을 비판했다. 일본 외무성도 “무력으로 현상을 변경하려는 일방적 시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 정부 역시 “유엔해양법 협약을 포함한 국제법 원칙에 따른 항행과 상공비행의 자유를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국무부는 전날 “중국의 도발적 행동에 대해 우리 동맹인 필리핀과 연대한다”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중국은 필리핀의 영토 주권 침해에 정당하게 맞섰을 뿐이라고 반발했다. 화살을 미국에 돌리기도 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은 흑백을 전도해 중국의 정당한 권리 수호 행위를 이유 없이 공격하고, 걸핏하면 미·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을 들먹이며 중국을 위협한다”고 말했다. 또 미국이 필리핀을 ‘장기말’로 삼고 있다며 “장기판의 말은 결국 버려지는 말이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