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로 비상진료대책을 시행 중인 의료진과 병원을 위해 예비비 1,285억 원을 긴급 투입한다. 전공의 빈자리를 메우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지침을 세부적으로 정리한 ‘가이드라인’도 배포했다. ‘3개월 면허정지’ 압박에도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자 본격적으로 장기전 대비에 들어간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6일 오후 국무회의를 열어 1,285억 원(보건복지부 1,254억 원·국가보훈부 31억 원) 규모 예비비를 심의·의결했다. 복지부는 예비비로 전공의 대체 인력 채용에 필요한 재정을 한시적으로 지원하고, 야간·휴일 당직근무 및 비상진료인력 인건비(580억 원), 공공병원 연장 진료 운영비(393억 원), 고위험 산모·신생아 집중치료센터 지원금(12억 원)을 편성해 현장을 지키는 의료진을 충분히 보상할 계획이다. 인력난을 겪는 민간병원에는 공보의도 파견한다(59억 원).
의료전달체계 개선 예산도 마련됐다. 상급종합병원은 중증환자 입원·수술에 집중하고 중등증·경증환자는 일반병원을 이용하도록 환자 전원체계를 강화한다. 일반병원이 상급종합병원에서 전원된 환자를 진료하면 추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40억 원). 또 응급실 포화를 막기 위해 중증 응급환자는 전국 24개 권역응급의료센터로, 경증·비응급환자는 지역응급의료센터로 각각 이송하고(68억 원), 지역병원으로 옮기는 환자에겐 구급차 이용료도 지급한다(5억 원).
정부가 당장의 인건비 보전뿐 아니라 의료시스템 개편에도 투자를 아까지 않은 건 의료공백 장기화를 고려한 포석이란 분석이 나온다. 환자 중증도에 따라 의료기관 간 진료협력체계가 원활하게 작동되면 응급·중증환자는 적기에 치료받을 수 있고 의료진은 업무 과부하가 줄어 전공의가 없어도 당분간 버틸 수 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신속하게 예비비를 집행해 국민 불편을 최소화하고, 앞으로도 재정적 지원을 포함한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상진료지침도 지속 가능하도록 구체화·체계화된다. 복지부는 지난달 27일 시작된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6일 각 병원에 전달했다. 간호사들이 시범사업 기간 합법적으로 의사 업무 일부를 맡게 됐지만 업무 범위가 불분명해 위험 부담이 크다는 지적을 반영한 조치다. 직무에 따라 진료지원(PA)간호사, 전문간호사, 일반간호사로 나눠 각각 허용되는 의료행위 100여 가지를 규정했다. 추후 병원에서 경계가 애매한 의료행위에 대한 추가 문의가 오면 대한간호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의학회가 참여하는 내부 위원회가 신속하게 판단해 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가 재정·행정 지원에 나섰지만, 의료현장의 혼란은 여전하다. 수술·입원 환자가 줄어들자 주요 병원들은 병동을 통폐합하거나 응급실 진료 과목을 제한하는 등 축소 운영에 들어갔다. 부산대병원과 충북대병원은 이미 유사 진료과끼리 병동을 합쳐 운영 중이고, 서울 상급종합병원들도 입원 환자를 받지 않는 방식으로 환자 수를 줄여가면서 병동 통폐합 수순을 밟고 있다.
서울아산병원과 경희의료원, 서울대병원에선 인건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간호사들에게 무급휴가 공지가 내려왔다. 휴가를 가지 않으면 다른 진료과 병동으로 전출시키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병동에선 근무조가 3교대에서 2교대로 바뀌었고, 행정을 담당하는 간호사 수도 줄였다. 김혜정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 부분회장은 “평소에 인력 부족을 호소해도 인건비 아끼려 충원을 안 해 주더니, 이제는 손실을 보지 않으려고 간호사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근무를 계속한다 해도 병동마다 업무가 달라 교육도 없이 투입되면 응급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환자가 많은 진료과에선 간호사들이 권한 밖 업무를 강요받고 있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고위험 의약품인데도 원칙적으로 금지된 구두 처방을 받아 두려움 속에 시행한 사례, 신입 간호사와 수술실 간호사에게 PA간호사 업무 교육을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온 사례 등이 접수됐다. 심지어 의사가 없어서 간호사에게 환자 사망선언을 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병원에 남은 전문의들도 그간 전공의들이 수행했던 수액 배합 처방 등 익숙하지 않은 업무에 야간 당직까지 감당하느라 과부하 상태다.
병원 운영이 파행으로 치닫고 환자 피해가 불어나지만, 전공의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무관용” 원칙을 내세운 정부는 4, 5일 주요 100개 수련병원에서 현장 채증을 실시한 데 이어 6일엔 각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관할 의료기관별로 최종 점검을 마쳤다.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3개월 면허정지 사전통지는 5일부터 시작했는데 워낙 대상자가 많아 시일은 다소 걸릴 전망이다. 4일 기준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는 전체 90% 수준인 8,983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