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제3국에서 난민 심사를 받도록 하려는 ‘영국식 이민 정책’ 도입 논란에 휩싸일 조짐이다. 유럽의회 내 제1당이 오는 6월 선거를 앞두고 영국 모델을 벤치마킹해 ‘불법 이주민을 제3세계 나라로 보내자’는, 사실상 반(反)이민 공약을 내걸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인권 침해 소지가 큰 탓에 아직 영국에서조차 해당 정책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최근 유럽 내 우경화 바람을 타고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 가디언은 6일(현지시간) “유럽국민당(EPP)이 유럽의회 선거 공약 초안에 ‘이주민을 안전한 제3국으로 보내기 위해 역외 국가들과 협력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보도했다. 중도 우파 성향인 EPP는 현재 유럽의회 705개 의석 중 최다인 177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 그룹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EPP의 이 같은 공약은 이른바 ‘르완다 법안’으로 불리는 영국 정부 정책을 빼닮았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2022년 4월부터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영국으로 온 이주민을 6,500㎞ 떨어진 아프리카 르완다로 보내 망명 심사를 받도록 하는 법안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민자 유입을 원천 봉쇄하는 데 실패하자, 이주민 수용을 제3국에 ‘외주화’하려는 게 골자다. 가디언은 EPP 공약 초안에도 “역내에서 망명을 신청한 사람은 누구든지 안전한 제3국으로 이송시켜 망명 절차를 거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전했다.
물론 이 공약이 실제 EU 정책으로 현실화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다. 이주민이 이송된 국가에서 이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면 국제법 위반 소지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일단 영국부터 의회 문턱을 아직 넘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영국 대법원, 올해 1월 유럽인권재판소(ECHR)가 르완다 법안의 위법성을 각각 지적한 데 이어, 영국 상원도 전날 제동을 걸었다. 보수당 우위인 하원에서만 올봄 시행을 목표로 통과시켰을 뿐, 상원은 난민 신청자의 르완다 강제 이송을 매우 까다롭게 하도록 수정을 요구하는 안건 5건을 가결했다. 수정안은 하원의 재심사를 받을 예정이다.
중도 성향 ‘리뉴 유럽’ 소속인 소피 인 트벨트 유럽의회 의원은 가디언에 “EPP는 해당 공약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극우표를 잡기 위해 ‘불미스러운 붉은 고깃덩어리’를 던졌다”고 비판했다. EU의 한 관계자도 “(유럽의회 제2당인) 사회당그룹(S&D)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법제화 가능성과 별개로, EPP의 이러한 움직임이 유럽의회 선거 전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PP가 제1당 지위인 것은 물론, 현재 유럽 내 반이민 정서가 어느 때보다도 강한 탓이다. 실제 극우 성향 정당이 유럽 각국에서 약진하고 있다. 반대로 지난해 EU가 튀니지·이집트 등에 불법 이민 단속 지원금 제공 협약을 맺었다가 인권단체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격렬한 논쟁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가디언은 “유럽 이민 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EPP의 공약은 유럽의회 내 긴장을 고조킬 것”이라며 “올해 재선에 도전하는 EPP 소속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에게 정치적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