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이나 감금된 남자, 곁을 지킨 부인... 둘의 동상이 장제스 고향에 세워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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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9 10:00
<134> 절강고진 ⑥닝보

저장성 동북부 해안 도시 닝보(寧波)로 간다. 기원전부터 부르던 용성(甬城)이 별칭이다. 큰 종(鍾)인 용(鏞)을 의미한다. 사마천의 사기 ‘오세가(吳世家)’에 보면 와신상담 후 복수에 성공한 구천이 부차를 용의 동쪽에 유배했다. 춘추시대 월나라 영토다. 당나라 시대부터 명주(明州)라 불렀다. 명나라 건국 후 14년이 흘렀다. ‘바다의 물결이 평온하다’는 지명으로 바뀐다.

중국 최초의 사설도서관, 천일각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도서관이 있다. 남국서성(南國書城)이란 미명을 지닌 천일각(天一閣)이다. 한나라 말기의 학자 정현의 주석본인 주역정주(周易鄭注)에 ‘천일생수(天一生水)’라는 말이 담겼다. 책이 두려워하는 불, 불을 제압하는 물을 착안했다. 명나라 중기 병부우시랑을 역임한 범흠이 세웠다.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두루 찾아다니며 소장했다.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전국중점문물이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범흠 조각상이 반겨준다. 생애를 기록한 책 모양의 돌이 놓여있다. 뒤쪽 벽에 새긴 말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여덟 필 말이 개천에서 뛰어노는 계산일마도(溪山逸馬圖)다. 민간 예술인이 빚었다는데 갈기가 휘날리고 발굽을 높이 쳐들고 머리를 돌리고 꼬리를 흔들기도 한다. 장난기 있고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당시 소장된 장서가 7만 권에 이른다. 명성에 어울리는 멋진 예술품이다.

범흠은 은퇴 후 6년에 걸쳐 도서관을 건축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인 보서루(寶書樓)가 보인다. 바깥으로 해자를 파서 접근하기 어렵다. 두 가지 원칙을 정한다. 대를 잇되 책을 나누지 않으며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다는 유언을 남긴다. 전 재산과 도서관 장서로 따로 나눠 물려줬다. 청나라 초기 대학자 황종희에게 도서관 문을 열었을 뿐이다. 장서와 함께 도서관 구조가 유명세를 탔다.

청나라 건륭제가 중국 문헌 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다. 7만9,000권, 3만6,000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천일각을 본떠 장강을 기준으로 북쪽 4곳, 남쪽 3곳에 도서관을 지어 보관했다. 베이징 고궁의 문연각(文淵閣)을 비롯해 원명원(文源閣), 피서산장(文津閣), 션양 고궁(文溯閣)이 북사각이다. 전장(文宗閣), 양저우(文匯閣), 항저우(文瀾閣)의 사찰 행궁이 남삼각이다. 문연각 서적은 모두 타이베이로 옮겨갔다. 일곱 서고에 보관했던 책은 모두 다른 장소에 보관 중이거나 훼손됐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민란과 서구 열강의 침탈로 인해 제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닝보 관청의 학당에 있던 존경각(尊經閣)이 민국 시대인 1935년 천일각으로 옮겨졌다. 황제가 하사한 서적과 유교 경전이 함께 왔다. 민국 시대에 천일각에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발생한다. 상하이의 책방 주인들이 대도 쉬제지웨이를 꼬드겨 책을 훔치게 한다. 도서 목록을 들고 잠입해 낮에는 죽은 듯 잠을 자고 밤에 촛불을 켜고 반달 넘게 훔쳤다. 몰염치한 상인과 도둑은 모두 잡혀 재판에 회부됐다. 9년형을 받은 도둑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책을 회수한 정부는 천일각에 돌려주지 않고 상하이 동방도서관에 보관했다. 상하이를 침탈한 일본 제국주의자에 의해 도서관과 장서가 잿더미로 변했다. 천일각을 떠난 보물은 범흠의 유지와 달리 유출됐다. 명지(明池)에 가득 들어선 나무의 반영을 바라본다. ‘세상(天一)은 물(水)로 이뤄졌다(生)’는 주역은 그다지 효험이 없었나 보다.

장제스의 고향 시커우와 송씨 세 자매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1시간 떨어진 시커우진(溪口鎭)으로 간다. 장제스의 고향이다. 아치형 대문인 무령문(武嶺門)이 나타난다. 산등성마루라 약간 오르막이다. 원래 있던 암자를 허물고 장제스가 1930년대에 2층 누각을 세웠다. 당과 정부를 장악하고 1인 통치를 확립한 시기다. 국민당 원로이자 서예가인 우우임이 문의 편액을 썼다. 안으로 들어가 돌아보면 장제스가 쓴 무령 필체도 있다. 그다지 명필은 아니다.


마을로 들어서면 섬강(剡江)이 흐른다. 하천을 따라가면 장씨종사(蔣氏宗祠)가 나온다. 1930년대에 새로 지은 사당이다.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에 있던 장제스는 거침이 없었다. 마을 어른이 패방에 편액을 써달라는 요청을 했다. 마침 삼국지 소설을 읽고 있었다. 관우가 오관을 넘고 6명의 장수를 베는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 대목이었다. 난관을 극복하고 영광이나 공적을 자랑하려는 속내였다. 붓을 들어 충효전가(忠孝傳家)라 썼다. 지붕에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다.

장씨고거(蔣氏故居)로 간다. 장제스와 닮은 인물이 문을 지키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풍호방(豐鎬房)이라 불렀다. 주나라 도읍이던 풍읍(豐邑)과 호경(鎬京)에서 따왔다. 예법과 제도를 다룬 주례의 발상지를 상징한다. 두 손자가 태어났다. 풍방은 장제스, 호방은 친동생 장루이칭 차지였다. 형보다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성년이 되기 전 요절했다. 장제스가 풍호방 모두를 계승했다. 두 아들도 자(字)에 슬며시 욕심을 부렸다. 장남 장징궈는 건풍(建豐), 양아들 장웨이궈는 건호(建鎬)라 했다.


보본당(报本堂) 기둥이 핏빛처럼 붉다. 방 중앙에 높이 걸린 궁등(宮燈)이 화려하다. 4대에 이르는 조상 신위를 차례로 세웠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고급스러운 의자를 배치했다. 등받이에 둥글게 돌을 깎았는데 거울인 양 반짝인다. 위쪽에 걸린 우리수기(寓理帥氣) 편액이 특별해 보인다. 1949년 1월 장제스는 하야 후 고향에 내려왔다. 4월 15일 장징궈의 40세 생일날 아침에 써준 문구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세상 이치를 마음에 품어 통솔의 기상을 펼치라’는 바람이다.

지붕에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쌍룡창주(雙龍搶珠) 조각상이 보인다. 인간이 지닌 욕망을 잘 드러내는 삼성고조(三星高照)를 함께 구성했다. 삼성은 복록수(福祿壽)를 관장하는 신이다. 정교한 조형물이다. 황룡의 색감과 약간 빛 바랜 삼성의 자태가 어울린 모습이다. 역광의 나뭇잎과 하늘도 지붕을 감싸고 있다.

청려(清廬) 대문이 나온다. 아름답고 평온한 집이란 자랑이다. 왼쪽에 옥태염포원지(玉泰鹽鋪原址)라 적혀 있다. 장제스 호인 중정(中正)이 썼다는 흔적도 보인다. 장제스가 태어난 2층 가옥이다. 장제스는 상인 집안 출신이다. 청나라 동치제 시대 1871년에 할아버지가 소금 가게를 열었다. 나중에는 술도 주정했고 쌀과 잡화도 판매했다. 아버지가 계승했다가 사망하자 장제스의 배다른 형이 운영했다.

장제스는 부인과 이혼하고 쑹메이링과 혼인한다. 쑨원의 부인 쑹칭링의 누이동생이다. 공자의 75세손으로 상인인 쿵상시와 결혼한 쑹아이링이 큰언니다. 세 자매는 결혼만으로도 놀라웠다. 강변에 세 자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1997년 홍콩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가 상영됐다. 돈, 국가, 명예를 각각 사랑한 세 자매다. 공산당과 협력하라는 쑨원의 유지를 받든 쑹칭링만 대륙에 남고 모두 대만으로 이주했다.

설두산 천장암 폭포와 설두사 미륵대불


장씨 족보에 따르면 8세부터 설두산(雪竇山)에 올랐다. 고향에 오면 아들과 함께 등산을 했다. 멀리서 보면 동굴에서 눈이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고 했다. 눈이 드문데 야릇한 이름인 까닭이다. 산길 4km를 올라가면 삼은담(三隱潭) 입구에 도착한다. 폭포가 만든 연못 세 곳을 따라 내려간다. 상은담(上隱潭)과 만난다. 연못을 바라보고 용왕묘가 자리 잡고 있다. 나무와 물이 어우러진 청정지역이다. 하은담(下隱潭)까지 내려오면 모노레일이 기다린다.

모노레일을 타고 숲을 완만하게 돌아가면 거대한 폭포가 눈앞에 쏟아진다. 설두산을 상징하는 천장암(千丈巖) 폭포다. 낙차가 186m에 이른다. 폭포수가 수직으로 떨어지고 사방으로 휘날린다. 바닥에 꽤 깊고 넓은 연못이 생겨날 정도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이라도 했을 법하다. 암반에 쓴 글씨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붉고 깊다.

케이블카를 타고 절벽을 오르면 점점 천장암과 폭포가 영화처럼 등장한다.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오르는데 수직으로 오르면 훨씬 생생할 듯하다. 북송의 개혁을 추진한 왕안석이 ‘천장암폭포’라는 시를 남겼다. 폭포수는 선녀가 걸어둔 하얀 명주실이며 햇볕이 비치면 오색찬란한 무늬가 빛난다고 노래했다. 시인의 감수성에 공감하면 자연은 더욱 풍성해진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묘고대(妙高臺)가 나타난다. 장제스가 정치에서 물러나고 낙향한 1927년에 만든 별장이다. 고향에 올 때마다 머무르던 공간이다. 마당 가운데 사리탑이 하나 있다. 청나라 옹정제 시대인 1726년에 설두사(雪竇寺) 주지의 공덕을 기념해 세운 탑이다. 명당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했다. 1949년 낙향했을 때 약 3개월 동안 머무르며 막후 지휘를 하기도 했다.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타이완으로 도주했다.


민국 시대에 이르러 미륵보살의 성지로 자리매김한 설두사다. 당나라 시대에 처음 건축된 고찰이다. 송나라 이후 선종십찰(禪宗十剎)의 반열에 올랐다. 멀리서도 높이 33m에 이르는 미륵대불 동상이 보인다. 청동 500톤으로 제작했다. 3층 높이의 기단 위에 연화좌(蓮花座)도 9m나 된다. 계단이 많아 한번 올라가려면 굳게 마음 먹어야 한다.

계단 앞에 평안전(平安殿)이 있다. 남송 승려 보제가 지은 책 제목인 오등회원(五鐙會元) 편액이 걸렸다. 항아리 안에 기름이 가득 차 있고 등잔 다섯 개가 떠다닌다. 문수보살의 오대산, 관음보살의 보타산, 보현보살의 아미산, 지장보살의 구화산과 함께 미륵보살의 설두산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로부터 오악과 함께 4대 불교 성지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다. 성지가 하나 더 늘어나니 낯설다.

장쉐량과 자오이디, 72년의 사랑

시안에 가면 당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화청지가 있다. 마오쩌둥 홍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장제스가 1936년 시안에 와서 머물던 오간청(五間廳)이 있다. 항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장쉐량은 양후청 부대와 연합해 12월 12일 새벽 장제스를 체포한다. 제2차 국공연합이 이뤄진다. 공산당의 만류에도 난징으로 돌아간 장쉐량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세계 최장수 구금자가 된다.

1937년 1월 돌연 장제스의 고향 뒷산으로 옮겨졌다. 장쉐량의 구금 생활이 시작된다. 설두사 옆에 상하이의 한 여행사가 만든 초대소가 최초의 구금지다. 약 7개월을 머문 후 구금지는 계속 바뀐다. 장쉐량과 함께 자오이디 여사 조각상도 보인다. 10대에 만나 세 번째 부인이 된다. 1960년대에 정식 부부로 결혼식을 올린다.

장제스는 유언으로 절대 장쉐량을 풀어주지 말라고 했다. 가택 연금자 신분으로 타이완에 끌려간 장쉐량은 총통을 이어받은 아들 장징궈가 죽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된다. 자오이디는 가택 연금을 포함해 54년의 구금 기간 옆자리를 지켰다. 처음 만난 이후 72년 동안 헌신과 사랑을 베푼 자오 여사가 2000년에 사망한다. 하와이에서 이듬해 103세로 세상을 뜬 장쉐량과 합장된다. 늠름한 장군과 백조 같은 여인의 조각상이 있다. 두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니 자연스레 중국 근대사를 곱씹게 된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