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고 있다. 반도체 종주국 미국은 인텔과 마이크론을 마이크로소프트(MS)와 엔비디아가 밀어주는 형태로 사실상 ‘팀USA’를 결성하고 “실리콘을 실리콘밸리로” 돌려놓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한때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절반을 지배했던 일본도 대만 TSMC 공장을 유치하며 반도체 부활에 승부수를 던졌다. 반도체 파운드리(주문생산) 세계 1위 TSMC는 미국과 일본에 공장을 세우는 식으로 지정학적 리스크를 해소하고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추격을 따돌린다는 전략이다.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은 미국의 전방위 제재에도 첨단 공정인 7㎚(나노미터·1㎚는 10억 분의1m) 제품까지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인도도 대만 일본 업체 등을 유치, 반도체 공장 건설을 승인하며 '칩워(Chip War)'에 참전했다.
각국이 AI 반도체의 내재화를 외치면서 한국 미국 대만 일본의 칩4 동맹은 흔들리고 있다. 이젠 한국도 동맹 미국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참이다. AI 시대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절대 강자인 K반도체엔 기회이자 위기이다. AI 반도체에 쓰이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양분하고 있다는 건 호재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대한 기대도 나온다. 그러나 최근 미국과 일본 증시가 축포를 터뜨리고 있는 반면 한국만 저조한 건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냉정한 평가다. 시가총액에서 삼성전자에 한참 못 미쳤던 TSMC와 엔비디아의 시총은 어느새 삼성전자의 2~6배가 됐다. 천운도 살리지 못하면 K반도체도 언제든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지난달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2024’ 행사는 앞으로 미국이 AI 반도체의 설계뿐 아니라 생산도 직접 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미국을 2020년대 말까지 AI 등에 사용되는 첨단 로직 반도체의 20%를 제조할 수 있는 궤도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현재 미국에서 생산되는 로직 반도체가 전혀 없는데도 이런 공언을 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AI 반도체 공급망의 취약성에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발상지인 만큼 다시 반도체를 생산, 일자리도 창출하고 경제 안보도 챙기겠다는 게 미 정부의 의지다.
이날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의 언급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전체 반도체 공급망의 80%가 아시아에 편중돼 있는 건 안전하지 못하다고 강조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안보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는 대만과 한국에 반도체 생산이 집중된 건 문제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아시아 비중을 50%로 줄이고 그만큼 미국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를 통해 인텔은 2030년 세계 2위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에서 1위가 TSMC, 2위가 삼성전자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삼성전자를 겨냥한 목표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날 인텔은 올해 말 1.8㎚ 공정 반도체 양산 계획까지 공개했다. 이는 내년에나 2㎚ 칩을 양산하겠다는 TSMC와 삼성전자의 일정보다도 앞선다. 예전 같았으면 인텔의 발표는 허풍으로 치부됐다. 인텔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이 1%에 불과, 존재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인텔은 1.8㎚ 반도체를 주문한 곳이 4곳에 달하고 그중 한 곳이 MS라는 사실까지 공개했다. 파운드리 업체에 가장 중요한 게 고객 주문인데 이미 MS에서 주문을 땄다면 기술과 안정성을 검증받은 셈이 된다.
미 정부의 지원 아래 미국 업체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사티아 나델라 MS CEO는 “미국에서 강력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인텔의 노력을 적극 돕겠다”고 밝혔다. 만들기만 하면 사 줄 테니 걱정 말라는 얘기다.
미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차세대 HBM인 HBM3E를 세계 최초로 양산해 엔비디아에 공급하기로 한 것도 사실상 ‘팀USA’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 지난달 26일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D램을 8층으로 쌓아 올린 HBM3E가 2분기 출시될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반도체 패키지)인 H200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은 3위 업체다. 그런데 1, 2위보다 먼저 HBM3E 양산에 성공, AI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로 꼽히는 엔비디아 납품까지 따낸 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메모리 업체 중 엔비디아 H200 납품을 발표한 곳은 마이크론뿐이다.
1980년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일본도 몸을 풀고 있다. 우선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만과 연합군을 형성했다. 지난달 24일 일본 구마모토에서 열린 TSMC 제1공장 준공식은 이러한 일본 대만 반도체 동맹의 상징적 장면을 연출했다. 86억 달러(약 11조 원)가 투입된 축구장 30개 크기의 공장은 단 2년도 안 돼 완공됐다. 일본 정부는 절반에 가까운 4,760억 엔(약 4조3,000억 원)을 지원했다. 제2공장도 곧 착공, 2027년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세운 건 처음이다. TSMC 창업주인 모리스 창(92) 회장은 준공식에 직접 참석, “일본 반도체 제조 르네상스의 시작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TSMC 이외에도 이미 대만 반도체 관련 기업 10여 곳이 일본에 진출했다. 미국의 압박과 권유에 TSMC는 공장을 대만 밖에 짓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각에선 대만이 미중 반도체 전쟁의 용병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AI 반도체 품귀에 주문생산 업체 TSMC가 오히려 설계 업체보다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도요타와 소니 등 대기업 8곳을 묶어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도 설립했다. 라피더스는 캐나다의 텐스토렌트와 2㎚ 공정의 AI 반도체를 공동 개발, 2028년부터 양산하겠다는 계획이다. 한 자릿수인 일본의 반도체 자급률을 2031년 40%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게 일본의 복안이다.
중국은 미국의 고강도 제재에도 꿋꿋하게 반도체 굴기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중국 최대 반도체 기업 SMIC가 지난해 8월 화웨이 설계의 7㎚ 공정 반도체를 제작한 게 대표적인 예다. 성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있지만 미국이 반도체 장비는 물론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 노광 장비 수출까지 막은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란 점은 주목된다.
화웨이는 엔비디아의 AI 반도체와 경쟁이 가능한 제품도 개발, 엔비디아가 경쟁자로 인정했을 정도다. 첨단 미세 공정이 필요 없는 저가 제품에선 중국산이 크게 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중국의 범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2027년 39%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인도도 미중 충돌 틈바구니를 노리며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인도는 정보기술(IT) 인재가 풍부하다는 점, 영어를 쓴다는 점, 건설비 절반을 보조금으로 지원하겠다는 당근 등을 내세워 반도체 공장 유치전에 나섰다. 인도 타타그룹이 대만 파운드리 PSMC와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밝혔고, 또 다른 인도 기업 CG파워도 일본 르네사스와 손잡고 생산 라인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주요 국가들이 AI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은 AI가 결국 국가 간 패권 경쟁에서 최종 병기가 될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지난 50여 년간 석유가 세계 경제를 지배했다면 앞으론 성능이 뛰어난 AI 반도체를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사실 AI 반도체는 경제뿐 아니라 군사력을 결정하는 핵심 기술이란 점에서 안보와도 직결된다. 너도나도 AI 반도체 확보전에 나섰다. 실제로 AI 컴퓨팅에 필요한 대용량 데이터 학습에 특화된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데도 품귀다. 미국이 엔비디아의 대중 수출을 통제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AI 반도체 공급 부족은 자연스레 막대한 투자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AI 반도체 제조를 위해 무려 7조 달러(약 9,300조 원)의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보도를 흘려들을 수 없는 이유다. 이후 올트먼 CEO는 “잘못된 기사를 고치는 게 내 일은 아니다”라며 오보임을 시사하면서도 “핵심은 AI 컴퓨팅엔 훨씬 더 많은 반도체(칩)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9,300조 원은 허무맹랑한 수치다. 현재 반도체 생산 라인을 건설하는 데엔 30조 원 안팎 든다. 9,300조 원이면 반도체 공장을 300개도 넘게 지을 수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반도체 산업은 돈만 있다고 뚝딱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장비와 기술은 물론 운영 경험까지 갖춰야만 한다”며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한데, 이러한 반도체 인력은 한국과 대만에만 있다”고 꼬집었다. 최근 올트먼 CEO가 방한한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올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규모를 다 합쳐도 6,240억 달러(약 830조 원)란 사실도 올트먼의 과장이 얼마나 심한지 보여준다. 아무리 AI 반도체 시장이 커져도 현재 규모보다 10배 큰 투자금이 필요하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엔비디아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공격적인 선언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며 “시장이 커지면 메모리나 HBM을 더 많이 팔 수 있어 우리에겐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올트먼이 AI 반도체 공급망을 위해 막대한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중동 자금을 끌어들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석유로 번 돈을 미래의 석유가 될 AI 반도체에 투자하게 한다는 건 매력적인 제안이다. 이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국부펀드로 아부다비 왕가가 주축인 무바달라투자회사가 미국의 글로벌파운드리 지분을 사들인 바 있다. 반도체 애널리스트 출신인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올트먼의 9,300조 원 허풍은 금액보다 동맹군을 규합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며 “더 많은 동맹군을 모으기 위해 빅픽처를 제시하고 스케일을 크게 잡아 꿈을 팔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전 세계를 뒤흔든 9,300조 원 펀딩설은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앞으로 AI 반도체 전쟁과 투자가 얼마나 더 치열해지고 커질지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미국 엔비디아와 일본 반도체 장비 업체 주가가 급등하는 배경이다. K반도체가 갈림길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