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후 해외 떠돌던 고려·조선시대 '묘지석' 대거 돌아왔다..."귀중한 종합문화유산"

입력
2024.03.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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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묘지 5점이 한꺼번에 귀환
묘지는 시대상, 문체, 예술성 망라한 사료

"아유, 관 안에 금붙이 넣지 말라니까..."

13일 기준 누적 관객수 829만 명을 돌파한 영화 '파묘'에는 장의사 영근(유해진)이 열린 관에서 금붙이를 슬쩍 빼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시신과 함께 왜 금붙이를 넣은 걸까. 삼국시대 이전부터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항아리, 볍씨, 귀걸이 등 온갖 부장품(껴묻거리)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다. 저승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망자에게 쥐여주는 일종의 노잣돈이었다.

무덤 주인이 누구이고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를 기록한 '묘지석(묘지)'은 대표적인 부장품 중 하나였다. 이승에 남은 사람들에게 묘지 주인을 알리기 위해 '비석(묘비)'을 세웠다면, 죽은 자를 향한 마지막 헌사를 담아 매장한 것이 '묘지'다. 돌에 새긴 경우는 묘지석(지석)이라 부르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백자 같은 자기에 글자를 썼기에 묘지라는 명칭이 더 넓게 통용된다. 묘지에 새긴 명문인 '묘지명'을 쓰는 것은 빼어난 문장가에게 맡길 정도로 신성한 일로 취급됐다.

학술적 측면에서 묘지는 역사적 사료이자 문헌이다. 무덤 주인의 인적사항, 사망·매장 시점을 적은 명문과 예술적 조형성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 문체, 양식 등을 두루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묘지 연구 권위자인 김용선 한림대 명예교수(사학)는 "돌을 가공해 뛰어난 문장, 그림, 무늬를 새겨 넣은 묘지는 그 시대의 '사생관(死生觀)'을 비롯한 종교적 맥락뿐 아니라 묘지석 제조기술에 녹아 있는 미적 감각, 미술사, 예술적 역량 등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종합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민간 재단 노력 끝에 '이례적'으로 5점 묘지 환수

타국을 떠돌던 고려·조선시대 묘지 5점이 최근 한꺼번에 돌아왔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환수하고 연구하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17년부터 2023년까지 5년 동안 환수한 묘지 5점인 점을 감안하면, 5명의 묘지가 돌아온 것은 이례적이다. 민간 재단법인 문화유산회복재단은 최근 환수한 △조선 전기 문신 김사문 묘지석 △조선 금강부수 이주 묘지 △고려 문신 '경휘'의 묘지석 △조선 손창만의 묘지 8조각 △조선 태인 허씨의 원통형 철화백자묘지 등 5점의 실물을 한국일보에 공개했다.



해외 떠돌다 고국으로 돌아온 묘지 5점의 면면

"윤원형(중종 시기 외척)을 거슬러 하급 관료로 깊이 묻혔지만 퇴계 이 선생과 깊이 서로 교분했다." 이 문장이 쓰인 묘지 주인은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훗날 정2품 이조판서로 추증) 김사문(1502~1549)이다. 일반적으로 묘지는 개인의 가족관계, 과거 급제 사실, 관직 기록뿐 아니라 누구와 깊게 어울렸는지도 기록했다. 인적 관계망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아한 백자에 묘지명을 진사(수은으로 이루어진 광물)로 쓰고 유약을 발라 구운 묘지의 주인은 세조의 증손자인 이주다. 가로 19cm, 세로 26cm 크기의 묘지 한 매에 16자 11행으로 176자가 쓰여 있는데, 문장이 불완전한 것을 보면 앞뒤로 다른 묘지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고려시대 연구에서 묘지는 역사서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다음으로 중요하다. 비교적 문헌이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와 달리 참고할 수 있는 사료가 많지 않고, 대부분의 고려 유물이 개경(개성)이 있었던 북한에 있어 연구에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 환수한 고려 문신 경휘의 묘지석은 가로 47.5cm, 세로 20cm 석판으로 1235년에 제작됐다. 몽고 침입으로 인한 고려 조정의 강화도 천도 시기(1232~1270)에 강화도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 묻혔기에 전쟁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

17~19세기 조선은 백자 형태 묘지의 전성기였다. 직사각 판형부터 원통형, 대접형, 접시형 등 다양한 형태의 묘지가 유행했다. 재단이 환수한 묘지 가운데 태인 허씨(신원불상)의 것은 지름 15.6cm, 높이 19.3cm의 원통형 백자다. 17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작은 항아리 안팎으로 명문이 빽빽하게 적혔다. 신한균 사기장은 실물을 감정한 뒤 "철사를 주성분으로 한 안료로 원통 모양 백자에 글을 쓴 것은 무척 희소하게 내려온다"고 말했다. 딱지처럼 작은 백자 조각의 묘지도 발견됐다. 가로, 세로 7cm 정사각형 묘지 8조각은 영조 시기 손창만이라는 인물의 생전의 삶을 명확하게 말해준다.


유물 소장 '윤리' 대두... 묘지석 환수 급물살

1971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의 주인과 편년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을 소상히 밝히는 묘지석이 출토된 덕분이었다. 역사적 사료이자 문헌으로서 묘지의 가치를 보여 주는 사례다.

최근 '유물의 소장·전시에도 윤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묘지가 국내로 귀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조상을 공경·숭배하는 마음이 깃든 묘지를 후손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는 소장자와 소장처가 늘어나면서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의 '박물관 윤리강령'은 "사람의 뼈나 신성한 의미를 지닌 박물관 자료는 그것이 유래된 사회나 민족 구성원을 고려해 취득, 연구, 전시할 것"을 권고한다. 2017년 이선제 묘지(보물 제1993호)가 일본인 소장자의 기증으로 한국에 돌아온 사례가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은 2022년 이기하 묘지를 자진 반환했다.

물론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다. 김 교수는 "일본,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해외 박물관에도 묘지가 많이 소장돼 있는데 어디에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며 "반출 경위를 따져 환수를 추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조사부터 하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말했다. 이번 묘지 대거 환수를 추진한 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은 "묘지는 도자나 금속 공예품 등과 달리 윤리·도덕적 측면에서 회복돼야 할 유산"이라며 "연구 조사를 끝낸 후 묘지의 고향으로 각기 돌려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산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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