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헌법에 ‘임신중지(낙태)권’을 명시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제출한 개헌안이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압도적 격차로 통과되면서다. 형식적 절차로 여겨지는 의회 합동 표결만 통과하면 프랑스는 임신중지권을 보장하는 헌법을 가진 첫 번째 국가가 된다.
28일(현지시간) 미국 AP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상원은 이날 헌법에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지할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항을 추가하는 개헌안을 찬성 267표 대 반대 50표로 가결했다.
이로써 개헌안은 큰 이변이 없는 한 무난히 최종 승인을 받게 됐다. 하원 역시 지난달 30일 찬성 493표 대 반대 30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다음 달 4일 양원 합동 회의에서 상·하원 의원 5분의 3 이상 동의를 받는 절차가 남아 있으나, 무난히 가결될 것으로 예측된다. 프랑스는 정부가 개헌안을 제출할 경우 의회 동의를 구하면 국민투표 없이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
에리크 뒤퐁 모레티 프랑스 법무장관은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임신중지권을 헌법에 명시한 국가가 될 것"이라며 "프랑스 여성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 자유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강조했다”고 환영했다.
프랑스의 개헌은 선언적인 측면이 크다. 1975년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리는 시몬 베유 당시 보건장관이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한 이후 프랑스 국민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의심한 적이 없다. 현재도 임신 14주까지 자유로운 임신중지가 가능하고, 여론조사 결과 국민 85% 이상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보수 성향의 한 상원의원은 프랑스 AFP통신에 “이날 반대표를 던졌다면 앞으로 내 딸들은 크리스마스에 집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최근 서구 사회를 덮친 ‘백래시(진보적 변화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 영향이 크다. 특히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과거 50년간 임신중지권을 보장해 왔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자 프랑스에서라도 임신중지를 ‘되돌릴 수 없는 권리’로 만들자는 요구가 빗발쳤다. 최근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득세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우려를 더했다.
다만 다소 모호한 헌법 조문은 향후 논란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자유를 보장한다'는 표현의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초 좌파 진영은 국가가 적극적 지원 의무를 갖는 '권리'라는 표현이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우파 진영은 이에 반대하며 '자유'를 지지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마크롱 대통령이 '자유 보장'을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스테파니 에네트-보셰 프랑스 파리낭테르대 교수는 "'자유 보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향후 과제로 남았다"고 미국 뉴욕타임스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