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라 하나 시장일 수 없는

입력
2024.03.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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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입학정원 확대를 둘러싼 의정 극한 대치를 보면서 불현듯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 속 유명한 두 구절이 떠올랐다.(이하 이종인 번역 인용)

ⓐ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에 쏟는 관심 즉 자기애 덕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자비가 아니라 그들의 자기애에 말을 건다. (중략) 그 누구도 동료 시민의 자비심에 의지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 개인은 공공 이익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없고 또 자신이 그런 이익을 얼마나 많이 추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중략) 그는 이 경우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자기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추구한다. (중략) 개인은 자기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 이익을 일부러 추구했을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를 위한 이익을 따른다.

수틀리니 환자를 떠나 벌써 열흘째 돌아오지 않고 있는 전공의들을 보면서 ⓐ에 담긴 250년 전 혜안을 새삼 수긍하게 된다. '기대소득 감소 가능성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든 극한 행동에서, 스미스가 'self-love'라고 표현한 자기애, 이기심이 의사가 직업을 선택하는 최종 심급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젊은 그들조차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비심을 구했던 우리는 또 한 번 민망해졌다. 의대 증원을 일제히 반대하면서도 일사불란보다는 자중지란으로 흐르는 의사 사회의 행태 역시 직업윤리나 소명의식에 우선하는 자기애의 징표다.

이런 의료공백 국면에 ⓑ를 떠올리는 건 절로 탄식을 자아내는 일이다. 저마다 한껏 부린 욕심을 공공 이익으로 변모시킨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가 왜 이곳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고 오랜 세월을 견딘 고전경제학의 핵심 명제를 성급히 내칠 건 아니다. 흔히 '의료시장'으로 통칭되지만 한국 의료 제도는 순수한 시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주지하듯이 시장경제에서 수요와 공급을 적절히 조절하는 '가격'을 뜻하지만, 국내에서 의사가 공급하는 의료서비스 가격은 '의료수가'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정부가 결정한다. 필수의료 행위가 환자(수요)의 절박함이나 지불 의사에 비해 수가(가격)가 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신 정부는 의사 면허 발급(공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의사 수익을 보장해줬다. 정부는 또한 병원에는 강제지정제, 국민에게는 강제가입제를 적용해 원칙적으로 모든 의료서비스를 건강보험 체제에 편입시켰다.

요컨대 국가가 의료 인력·서비스 수급의 균형을 시장 원리에 맡기지 않고 정책적으로 조율했던 게 'K의료'의 요체다. 그 명분은 의료 공공성 강화였고, 의사들은 정부 의료정책의 핵심 파트너이자 공익의 복무자였다. 물론 의사 평균소득이 말해주듯 현 체제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의사 단체들이 이제 와서 '보건 독재' '직업 선택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의료현장의 혼란을 조장하는 건,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 방식이 거칠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시장 아닌 곳에서 시장 원리를 주장하는 행태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당사자들이 얼마나 신경 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 직종의 역사적·사회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자충수이기도 하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환자들이 기다리는 병원과 정부가 마련한 협상장으로 돌아갈 일이다.

이훈성 사회정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