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가격을 어떻게 정하는지는 한국뿐만 아니라 주요 제약·바이오 선진국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단순한 수치로 측정이 어려운 신약의 효과와 혁신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선진국의 신약 도입 제도가 글로벌 업계에서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혁신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유연하게 운영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항상 혁신성보다 비용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경직성 탓에 신약 도입에 공백이 생기거나 지연된다는 분석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선 신약이 건강보험 적용 여부를 평가받을 때 환자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1년을 지내는 데 드는 비용(ICER)에 따라 △일반 경제성 평가(ICER 2,500만 원 이하) △위험분담제1 적용(5,000만 원 이하) 중 한 가지 트랙을 선택한다. 이때 ICER는 신약 비용에서 기존 약의 비용을 뺀 값을, 신약 효능에서 기존 약의 효능을 뺀 값으로 나눈 수치다.
그런데 한국은 신약의 혁신성, 즉 효능을 선진국과 비교해 충분히 인정하지 않아 분모가 작아지기 때문에 ICER 수치를 기준 이내로 맞추려면 약값(신약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제약사들은 호소한다. ICER가 5,000만 원을 넘는 경우 경제성 평가를 면제받는 트랙도 있지만, 이는 치료 대상 질병이 희소질환이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데다 선진 8개국의 최저가로 약을 들여와야 하기 때문에 신약 개발사 입장에선 한국 시장 진출 자체를 다시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건강보험에 등재된 신약 99개 중 일반 경제성 평가 트랙을 통과한 약은 21개(21.2%)였다. 그런데 2020~23년엔 100개 중 6개(6%)에 그쳤고, 대신 경제성 평가가 면제된 신약이 19개(19%)로 늘었다. 갈수록 신약 기술이 고도화하고 약값이 올라가면서 경직된 ICER 수치를 기준으로 하는 일반 경제성 평가 방식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ICER는 영국, 호주, 캐나다 등도 활용한다. 하지만 한국처럼 신약 도입의 절대적 잣대가 되진 않는다. 신약 도입 시스템이 한국과 가장 비슷하다고 알려진 영국도 병의 특징, 임상적 유용성, 지불 가치, 사회적 요구 등 다양한 항목을 적용해 ICER 기준치가 한국보다 넓고 다층적이다. 일반 신약은 2만 파운드, 세포유전자치료제 같은 첨단 신약은 3만 파운드, 기대여명 3~24개월 환자의 약은 5만 파운드, 희소질환은 최대 30만 파운드로 다양하게 적용하는 식이다. 캐나다 역시 ICER를 가격 협상의 참고 자료로 쓸 뿐 결정적인 요소는 증상이 개선되는 수준이다. 또 최저 약값을 고집하기보다 주요 11개국 약값의 중앙값을 상한선으로 설정하는 등 유연성을 뒀다.
유럽에는 혁신 신약이라면 일단 도입부터 한 뒤 평가를 택하는 국가가 많다. 프랑스는 보험으로 신약을 쓰고 나서 사후 평가를 통해 제약사에게 얼마를 돌려받을지 결정하는데, 혁신성이 크면 아예 받지 않는 경우도 많다. 또 뛰어난 혁신 신약이 유럽 평균가를 수용할 경우 15일 이내에 바로 보험을 적용하는 패스트 트랙도 있다. 독일은 제약사가 신약에 원하는 가격을 자율적으로 매기게 하고, 1년 뒤 혁신성과 사용량까지 평가해 환급률과 할인율을 협상한다.
일본은 해외 약값의 평균에 혁신성을 평가하는 치료 개선 정보를 반영해 보정가를 부여한다. 임상적으로 유용한 새로운 원리, 기존 약보다 우월한 효능과 안전성, 증상 개선이 확인되면 혁신성을 인정받아 70~120%까지 약값을 더할 수 있다.
서동철 의약품정책연구소 소장은 "환자의 신약 접근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다양한 평가 지표를 적용하는 해외 주요국들과 달리 한국은 효능 대비 가격(ICER)이란 딱 떨어지는 숫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며 "제약사와 협상의 여지를 더욱 키워야 글로벌 혁신 신약의 신속한 도입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