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한 나라’냐, ‘공평한 사회’냐

입력
2024.02.26 17:00
26면
‘4·10 총선’은 국가 기조 갈릴 분수령
여야 의석수 따라 국정 궤도 천양지차
진흙탕 싸움 이면의 여야 정강 따져야

진보 변설가인 유시민 작가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 체제를 지지하는 이유를 최근 밝혔다. 이 대표가 고 노무현ㆍ문재인 전 대통령의 미진했던 부분을 더 잘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한 유튜브 좌담에서 그는 “(나중에) 노 대통령은 빨간 줄 쫙 긋고, 이거 기업 지원하는 경제분야 예산 몇 %까지 내리고 사회ㆍ복지 지출 몇 %까지 올려, 이렇게 무식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고 후회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애초부터 할 수 있는 만큼만, 조용히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비록 대선에서 졌지만 “누가 잡아가지고 확 좀 더 힘쓰는 사람 없나” 해서 이 대표를 다시 세우고 지지하게 됐다고 했다. 유 작가는 진보진영 전체를 이끄는 이념적 지도자로 자리매김된 상태다. 따라서 이 대표에 대한 그의 기대는 총선 후 민주당의 정치 방향을 잘 드러낸 시금석이라 할 만하다.

이번 총선에서도 여야 간 정책경쟁은 실종된 상태다. 진흙탕 싸움에 뒤엉켜 되레 국민의 올바른 선택을 방해하는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민생법안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야당의 의정은 온통 대통령 부인 명품백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데 소모됐다. 여당 또한 ‘이재명 사법 리스크’와 ‘86 청산론’으로 야당의 약점을 헤집는 데 골몰했을 뿐이다. 공천 국면에선 ‘무감동 공천’이니, ‘친명횡재 비명횡사’ 같은 야유 속에 정강ㆍ정책은 아예 언급도 안 되는 분위기가 됐다.

하지만 총선 끝나면 정치는 결국 당선 의석수에 따른 정당 간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돌아가기 마련이다. 진흙탕 싸움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런 싸움 이면에서 여야 각 당은 나름의 정강ㆍ정책에 따라 치열한 ‘진짜 정치’에 돌입할 것이다.

야당과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민주당은 유 작가의 기대처럼 한층 더 좌클릭한 사민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국민의 삶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공평한 사회’를 향해 문 정부 때처럼 양극화 완화정책이나 최저임금 인상, 부자ㆍ기업 증세, 종부세 강화 등이 재가동될 것이다. 외교적으론 미국과 거리 두기, 북한과의 관계 개선 등이 시도된다. 친명 대오에 진보당 등이 연대하는 만큼, 정치 양식은 훨씬 거세질 것이다. 범야권이 개헌 의석(200석 전후)을 확보할 정도로 압승하면, 최근 조국씨와 유 작가가 잇달아 언급한 사실상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까지 염두에 둔 정권타도 투쟁이 가열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정부ㆍ여당은 남은 3년여의 임기를 허송세월할 공산이 크다. 민주당 입법을 견제할 대통령 거부권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생성형AI 등장 이래 급물살을 타고 있는 AI와 반도체 기술혁명이나, 미국 대선과 미ㆍ중 갈등 지속 등에 따른 한반도 및 글로벌 외교지형의 급변 등 국가적 대처가 절실한 전략 어젠다 대응도 혼선을 겪거나 지체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반면, 여당이 승리하면 ‘부강한 나라’에 초점을 둔 정책이 힘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건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야당도 마찬가지지만, 여당이 부강한 나라를 지향한다고 해서 공평한 사회를 위한 노력이 외면되는 건 아니다. 다만 부강한 나라를 위한 노력들, 구조와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데 그래도 탄력을 받게 된다는 얘기다. 옳든 그르든, 글로벌 전략 어젠다 등에 대해서도 민첩하고 일관된 대처가 가능해질 것이다.

지역구를 근간으로 한 우리 국회의원 선거는 인물 선거로 기울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야가 정강ㆍ정책에서 극한 대립하는 상황에선 의원 개인의 정책적 역량보다는 정당의 정강ㆍ정책이 중요하다. 따라서 인물보다는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게 선택의 실효성을 높이는 길일 수 있다. 여든 야든 제3당이든, 국민의 현명한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선거다.

장인철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