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창업자 장중머우(모리스 창)는 24일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서 준공된 TSMC 구마모토 제1 공장 개소식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겠다며 TSMC 공장 두 곳에 모두 1조2,020억 엔(약 10조6,400억 원)을 보조하기로 한 일본 정부의 ‘통 큰’ 지원에 화답한 발언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장 창업자 외에도 올해 은퇴할 예정인 류더인 회장과 후임으로 내정된 웨이저자 최고경영자(CEO) 등 TSMC를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로 일궈 온 주역이 모두 참석했다. 일본 정부에선 사이토 겐 경제산업장관 등이 참석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공장 준공을 축하하며 이달 초 발표된 TSMC 제2 공장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TSMC 구마모토 제1 공장은 2022년 4월 착공해 지난해 말 완공됐다. 올봄 장비 반입과 설치 등을 거쳐 10~12월쯤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공장 운영은 TSMC의 자회사인 JASM이 맡는다. 구마모토 공장 운영을 위해 설립된 JASM엔 제1 공장 제품의 수요처인 소니(6%), 덴소(5.5%) 등 일본 기업들도 일부 출자했으며, 제2 공장의 수요처가 될 도요타자동차도 2% 지분을 취득할 예정이다.
JASM에는 대만에서 파견된 주재원 약 400명과 소니그룹 파견자 약 200명에다 현지 채용 인력을 더해 약 1,700명이 소속돼 있다. 제2 공장까지 건설되면 총 3,400명이 일하게 된다. 반도체 공정은 대부분 자동화돼 직접적인 고용 창출이 많은 편은 아니다.
제1 공장에선 선폭 22~28나노미터(㎚·1㎚는 10억 분의 1m), 12~16나노 등 구세대 반도체를 생산하고, 제2 공장은 6~7나노 반도체를 생산한다. TSMC는 두 공장에서 12인치 웨이퍼를 한 달에 10만 장 이상 생산할 예정이다.
TSMC의 구마모토 공장 건설 결정에는 막대한 보조금을 앞세운 일본 정부의 ‘구애’가 작용했다. 뛰어난 수율로 고품질 D램(메모리 반도체)을 생산했던 일본은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50%로 1위를 달렸다. 그러나 이후 계속 밀려나며 한국 등에 추월당했고 지금은 점유율이 10%를 밑돌고 있다.
이에 일본 경제산업성은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다시 부활시키겠다며 2019년부터 TSMC 공장 유치를 추진했다.
최근 일본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정부는 5나노 공정 첨단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엔 미국의 애플 같은 첨단 반도체 수요처가 없었고, TSMC는 일본이 아닌 미국에 첨단 5나노 공장을 짓겠다고 2020년 5월 발표했다.
좌절한 일본 정부에 희소식을 전한 것은 소니였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사용되는 CMOS 이미지 센서 세계 점유율 1위(51.6%)인 소니의 임원은 코로나19 이후 공급망 혼란으로 반도체 부족 현상이 심했던 2021년 1월 대만 TSMC를 방문했다. 이때 TSMC 측이 ‘소니가 충분한 양을 주문한다면 (이미지 센서에 쓰이는) 28나노의 구세대 공장을 일본에 지을 수도 있다’는 의향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자 경산성은 공장 건설 비용 절반에 달하는 4,750억 엔(약 4조2,500억 원)을 국비로 지원해 유치하기로 했다. 같은 해 10월 TSMC는 구마모토 공장 설립을 정식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보조금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도로나 철도 등 인프라(사회기반시설) 확충, 건설 인허가, 반도체 인재 육성, 대만 기술자들의 현장 정착 지원 등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지원했다.
TSMC가 지난 6일 제2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한 것도 일본의 전폭적 지원이 영향을 미쳤다. 사이토 장관은 제2 공장에 최대 7,320억 엔(약 6조4,800억 원)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이날 기자들에게 밝혔다. 두 공장을 합쳐 최대 10조 원 이상을 지원키로 한 것이다.
막대한 지원의 효과는 과거 일본 반도체 전성기 시절 ‘실리콘 아일랜드’라 불렸던 규슈 지역, 특히 구마모토현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공장을 위해 도로와 철도가 정비되고 인근에 위치한 장비, 소재, 부품 기업도 투자를 늘리기로 하자 주변에선 아파트와 호텔 건설이 잇따르며 땅값이 치솟았다.
경제산업성 규슈경제산업국은 TSMC가 진출을 표명한 2021년부터 3년간 규슈에서 관련 기업의 설비투자계획 74건이 발표됐고 투자액은 공식 발표된 것만으로 2조5,500억 엔(약 22조5,000억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규슈경제조사헙회는 2021년부터 10년간 반도체 설비 투자에 따른 규슈 지역 경제 효과를 20조770억 엔(약 177조7,000억 원)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미국에 비해 더 적극적인 일본 정부의 지원이 계속된다면 TSMC가 일본에 제3 공장, 제4 공장을 지을 가능성도 있다. 반도체 전문가인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TSMC 구마모토 공장의 경우 일본 정부 보조금 때문만이 아니라 안보 측면에서 미국 대만 일본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의도가 함께 작용한 것”이라며 “앞으로도 일본 정부가 협력 기조를 이어가고 수율도 충분히 나온다고 판단되면 추가 공장을 더 지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24일 일본과 대만이 손잡고 완성한 TSMC 구마모토 공장이 중국 반도체를 견제하고 공급망을 안정화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TSMC 공장을 통해 일본 정부가 애초 목표로 내세웠던 ‘히노마루(일본을 상징) 반도체의 부활’, 즉 일본 반도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 상승을 이뤄내는 것은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16년간 히타치와 엘피다 등 일본 반도체 업체에서 연구개발 엔지니어로 일했던 반도체 저널리스트 겸 컨설턴트인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장은 한국일보 통화에서 “JASM의 일본 업체 지분은 13% 정도에 불과하다”며 “일본 반도체의 세계 점유율 향상 효과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대규모 지원을 결정한 다른 반도체 프로젝트도 비슷하다”며 “마이크론 히로시마 공장(2,465억 엔)은 미국 지분이 100%이고, 키옥시아(1,429억 엔)도 일본 지분은 절반인데 웨스턴디지털 측에 합병되면 이 지분마저 줄어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기업에 조건 없이 막대한 보조금을 몰아줘도 괜찮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과거 일본 정부가 히타치와 NEC의 메모리 부문을 합병해 만든 엘피다가 파산하는 등 정부 주도 정책이 실책을 반복해 온 것도 우려를 더하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24일 TSMC를 비롯해 키옥시아나 라피더스 등 반도체 공장에 대한 정부 지원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전했다.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서두른다는 의미다.
미국도 2022년 '반도체과학법'을 통과시켜 국내외 반도체 기업에 5년간 총 537억 달러(약 71조5,500억 원)를 지원키로 했지만 미국에 이익이 되도록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 중 순수한 일본 반도체 제조업체는 라피더스뿐이다. 2022년 일본 정부가 주도해 설립된 라피더스는 거의 전액 정부 보조금으로 공장을 짓고 있으며, 미국 IBM의 2나노 기술을 전수받아 양산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공장 건설 중인 홋카이도 치토세시는 ‘제2의 구마모토’가 된다는 기대감에 부동산 가격도 오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미 3,300억 엔(약 2조9,000억 원)의 보조금 지원을 결정했고 2023년 보정예산(추가경정예산)을 통해 확보한 6,460억 엔(약 5조7,000억 원)의 기금도 대부분 라피더스에 지원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노가미 소장은 “일본의 현재 기술은 40나노 정도인데 갑자기 2나노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만에 하나 양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TSMC나 삼성 등에 비해 시기가 늦고 주문할 곳도 발굴하지 못해 적자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애플이나 엔비디아 등 최첨단 반도체의 수요처는 한정돼 있는데 이들이 TSMC 등 충분한 이력이 있는 업체가 아닌 신생 업체에 주문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천 명 단위의 연구개발 인력이 밤낮없이 미세공정을 연구하는 TSMC 등과 달리 라피더스의 현재 인력은 겨우 500명에 불과하다. 그는 “생성 인공지능(AI)으로 반도체 산업이 PC와 스마트폰에 이어 새로운 수요 폭발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보면서도 “일본 기업은 생성 AI에 쓰이는 첨단 반도체를 제조할 기술이 없어 혜택을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권 교수도 라피더스와 관련, “현재 확보된 예산은 양산 공장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