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도 '불금'은 있지만… 전후방 모두 매 순간 '전쟁 공포' 여전

입력
2024.02.26 15:00
14면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비극과 모순]
우크라이나 여가·문화 살펴봤더니
전쟁 탓에 '제대로 즐기기'는 불가능

편집자주

전쟁은 슬픔과 분노를 낳았다. 길어진 전쟁은 고민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년, 우크라이나와 이웃국가의 삶과 변화를 들여다봤다.


러시아와 3년째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도 여가와 문화가 있다. 전쟁터에서 조금 떨어진 후방 지역은 조금 더 평온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도 온전하게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최전선과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매 순간 전쟁을 느낄 수밖에 없어서다. 한국일보는 18일(현지시간)부터 수도 키이우 등에 머무르며 전쟁 속 현지의 일상을 취재했다.

'작품 없는' 박물관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 박물관·미술관은 아예 휴관했거나 일주일에 1, 2번 여는 식으로 운영일에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정상 영업을 하는 곳도 있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고미술을 대거 소장한 '카넨코 박물관'은 수~일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입장료 100흐리우냐(약 3,500원)를 내고 입장한 카넨코 박물관에 고미술 작품은 단 한 점도 없었다. 작품이 걸려 있어야 할 벽에는 작품 설명만 덩그러니 붙어 있고, 장식장도 텅 비어 있었다. 엽서 등을 전시한 특별전이 작게 열리고 있을 뿐이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러시아 공격으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작품을 지하 수장고에 옮겨 놨다"고 말했다. 전쟁 전에는 일주일 2,000명에 달했던 관람객도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한다.

'개점 휴업' 여행 상품

'키이우 여행'을 검색하면 여행 상품이 여러 개 나오지만 대부분은 '개점 휴업' 상태다. 전쟁터를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지 업체 '우크라인로칼'에 '키이우 도보 투어가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정말 방문하려는 것이냐"는 답이 돌아왔다.

러시아 공격으로 파괴된 장소를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 방문)'은 전쟁 후 새로 생긴 여행 프로그램이다. 현지 업체인 '캐피털 투어 앤 트랜스퍼스 키이우'는 러시아에 점령됐다 해방된 도시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다만 이 회사 관계자는 "수요가 많지는 않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특정 지역으로 여행을 주선하며 그 조건으로 자원 봉사를 수행하게끔 하는 '기부 투어'도 있다.

'공습 알람' 영화관

키이우 영화관은 대체로 정상 영업 중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지 않았다. 19일 오후 7시 시작된 미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 관객은 고작 10명 남짓이었다.

관객 감소는 영화 상영 도중 '러시아가 공격 중'이라는 공습 경보가 울리면 영화 관람을 멈추고 대피해야 하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키이우 한 대형 쇼핑몰 안에 있는 영화관 '오스카'의 매니저 막심은 "그래도 공습 알람이 거의 24시간 울렸을 때보다는 사정이 나아졌다"면서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나아지나 했던 영화 산업이 다시 침체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습 경보로 영화가 중단되면 관람객은 기존 티켓으로 2주 내에 다시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공연 시간 앞당긴' 오페라


키이우의 전통적 자랑인 오페라, 발레 공연 등은 오후 5, 6시에 시작됐다. 대부분 국가에서 오후 7, 8시쯤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공연이 2, 3시간이나 이른 것이다. 우크라이나 직장인의 통상 근무 시간이 오전 9시~오후 6시인 점을 고려해도 너무 빨랐다.

우크라이나 시립극장 관계자인 일리아 골로타는 "전쟁 후 계엄령으로 인해 통금이 생기면서 공연 시작 시간을 2, 3시간 앞당겼다"고 설명했다. 공연이 늦게 끝나면 귀가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키이우 기준 통금은 자정~오전 5시다. 골로타는 "관객은 전쟁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며 "전쟁 생각에서 벗어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찾는 관객이 많다"고 말했다.

'오후 11시면 문 닫는' 클럽


통금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은 클럽 등 '밤 문화'다. 키이우 인기 클럽 '주스바' 관계자는 "계엄령 때문에 오후 11시까지만 영업을 한다"고 말했다. 23일 오후 9시 30분쯤 입장한 클럽 내부 열기는 여느 클럽과 마찬가지로 뜨거웠지만, 입장 직후 공습 경보가 울려 전쟁 중임을 실감케 했다.

클럽은 오후 10시 30분부터 영업 종료 채비를 했다. 청소 담당 직원이 빗자루로 곳곳을 치웠고 바텐더들은 설거지를 했다. 키이우 외곽에 산다는 이반나(23)는 "오후 10시 48분에 지하철이 끊긴다"며 서둘러 역으로 향했다. 이반나를 따라 나온 키이우 중심가 거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키이우= 신은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