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진 전쟁에 지쳤지만..." 러시아에 지고 싶지 않은 우크라 국민들

입력
2024.02.24 04:30
2면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비극과 모순]
3신-승리 원하지만 지쳐가는 국민들

"푸틴과 싸운다고 모든 것 찬성 못해"
고국 떠나야 할까, 추가 징집 어쩌나 
민주주의 실현은... 긴 전쟁에 고민↑

편집자주

전쟁은 슬픔과 분노를 낳았다. 길어진 전쟁은 고민과 갈등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년, 우크라이나와 이웃국가의 삶과 변화를 들여다봤다.


2022년 2월 24일, 설마 했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던 그날로부터 꼬박 2년이 흘렀다. 전쟁은 이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일상'이 됐다. 긴 전쟁에 우크라이나 국민은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 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전쟁이 낳은 슬픔과 분노는 여전했고, 저마다의 고민은 다양해지고 또 깊어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쌓여 있는 고민과 걱정을 한국일보가 18일(현지시간)부터 수도 키이우 등에서 취재하고 있다.

"끝 모를 전쟁, 우크라 떠나야 하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2년째 루한스크·도네츠크·자포리자·헤르손주(州) 등 우크라이나 동부를 중심으로 치열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 군인 전사자만 우크라이나가 7만~8만, 러시아가 12만~23만 명에 이를 정도로 희생이 컸다. 우크라이나 민간인도 1만 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우크라이나 국토 곳곳이 황폐해졌고, 국내외 난민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길어지는 전쟁 속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피로와 고통은 가중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가 19일 "도네츠크주 아우디우카를 점령했다"고 알린 건 우크라이나에 큰 충격이었다. 지난해 5월 바흐무트를 내준 데 이어 동부 요충지를 또 빼앗겼기 때문이다.

키이우 시민 카테리나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전장에서 계속 잃고 있다"며 "러시아가 동부 전선에서 조금씩 진격해 오는 게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산책을 하던 발레리는 "때로는 군대를 철수하는 게 유일한 선택이고, 현명한 조치일 때가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지난해 6월 선포한 '대반격'이 사실상 실패로 결론 나자, 미래에 대한 희망도 크게 옅어진 모습이었다. 빅토리아는 "언젠가 영토 수복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면서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12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우크라이나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답변은 1년 만에 78%에서 63%로, 15%포인트 떨어졌다(우크라이나 싱크탱크 '일초 쿠체리우 민주적 이니셔티브 재단').

미국 등 서방 국가에 대한 이중적 심경도 감지됐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무기 지원을 하고 있는 서방이 고맙다고 했지만, 적시에 무기 지원을 하지 않는 데 대한 아쉬움을 보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카테리나는 "우방국의 군사 지원이 고맙지만 우리 스스로 무기를 만들며 강해져야 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기약 없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이제라도 고국을 떠나야 할까' 고민하는 이도 많아졌다고 한다. 세 살짜리 아들과 영국으로 떠나고 싶다는 나탈리아(34)는 "가능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떨궜다. 우크라이나 난민이 영국에 정착하려면 일종의 '보증인'이 필요하다.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에서 탈출해 키이우에 정착했다는 보이코는 미국행을 고민하고 있었다. 지난 연말 러시아가 키이우를 포함, 우크라이나 전역에 개전 후 최대 규모 공습을 감행했을 때 "더는 안 되겠다"며 짐을 꾸려 떠난 이도 상당하다. 해외에 머무르는 우크라이나 난민은 644만 명에 달한다.

찜찜한 군 인사... 추가 징집도 걱정

가뜩이나 전장의 상황이 좋지 않은 시점에 전해진 우크라이나 지도부 분열 소식에 시민들은 더욱 뒤숭숭한 모습이었다. 최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을 발레리 잘루즈니에서 올렉산드르 시르스키로 교체했다. 이를 두고 '전략상 불일치 때문에 생긴 오랜 갈등이 터졌다'는 해석부터 '젤렌스키 대통령이 자신보다 인기 높은 잘루즈니 사령관을 경계했다'는 소문까지 무성한 상황이다.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을 믿는다'는 응답자는 94%로, 젤렌스키 대통령(64%) 신임도보다 높았다.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 시민 미하일로는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사람을 경질하는 건 옳지 않다"며 "부모가 러시아인인 신임 총사령관(시르스키)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곧 추가 징집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 이를 힘겹게 했다.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최전선에 나가야 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병사 평균 연령은 43세 정도로 비교적 높다. 러시아와 비교했을 때 병력이 적은 것은 물론, 긴 전쟁으로 충분한 휴식 및 교대가 이뤄지지 않아 우크라이나 정부는 45만~50만 명을 더 동원하고자 한다.

키이우 시내에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던 나스티야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민주주의 지키기 전쟁' 잊지 말자

징병 문제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 사안이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이겨야 하는 이유이자 최종 목표인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측면이 있어서. 추가 징집을 위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모든 잠재적 징집병(18~60세 남성)이 전자메일 계정을 만들고 △이 계정으로 전달되는 소환장에 응하지 않는 경우 은행 계좌 차단, 해외 영사 서비스 금지 등 제재를 가하는 식으로 법을 바꾸려 하고 있다.

현재는 본인이 직접 징집 소환장을 수령하거나 우편으로 받았을 경우에만 제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법은 자유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비등하다. 해외에서의 영사 조력을 '복무 조건'으로 두는 것 역시 국가의 본질을 잊은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커플인 세르히와 옥사나는 "제대로 된 전략과 동원 방법을 가진 채 병력을 더 동원하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 경질 과정을 두고도 민주주의 침해 우려가 제기됐다. 국민들의 신뢰가 많은 인물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전장 상황을 우크라이나 정부가 솔직하게 전하고 있는 게 맞느냐는 의문도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역사 교수인 안드리 포트노프 비아드리나 유럽대 교수는 "전쟁이 장기화하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국민들이 지도자에게 '더 많은 소통'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회에는 오랜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 피로, 충격적인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가 축적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부가 잘못과 실수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가까운 미래에 대한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더 많이, 더 솔직하게 소통하는 건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현지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고민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이 하나로 모였다. '우크라이나의 승리.' 대학생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혼돈은 러시아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를 통해서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분명 지쳐 있었지만, 패배를 전망하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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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신은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