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의 중편소설 ‘단지 소설일 뿐이네’에 등장하는 그럭저럭 잘나가는 중견 작가 S는 소설을 발표하고 기자로부터 “이번 책의 로그 라인(한 줄로 요약된 줄거리)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호모 스키펜스(Homo Skipens)에게’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이 조어가 뜻하는 대로 “쇼츠에 점령당하고 스킵하기(건너뛰기)가 일상화된 인류”에게 보내는 작가, 나아가 창작자 모두의 이야기로도 들립니다.
넷플릭스와 왓챠, 티빙 등 대부분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콘텐츠의 재생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시대입니다. 유튜브도 마찬가지죠. 드라마나 영화를 1.5배속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아예 관심 없는 부분은 ‘10초 후’ 버튼을 눌러 넘겨버리기 일쑤입니다.
소설 속 작가 S는 이에 묻습니다. “각 배우의 얼굴과 동작이 아니라 무심한 듯 포착된 사물과 공간의 상징과 디테일은, 감독이 어떤 의도로 클로즈업했는지 정답 같은 것은 없으나 음악과 음향과 촬영 각도와 빛과 더불어 총체적인 미장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장치들은, 그대로 간과되어도 무방한 것들일까.” 이런 현실에서 “별반 볼거리도 없이 흑백의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소설”에 대한 취급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단지 소설일 뿐이네’는 작가 S와 그가 실종되기 전 연락했던 출판사 편집자의 독백이 내내 이어집니다. 기승전결도 없고, 줄거리도 애매해 영 읽기 어렵지만 이 소설은 ‘쉬운 콘텐츠’만을 찾는 호모 스키펜스에게 보내는 창작자의 저항일지도 모릅니다. “세상 어떤 결말도 눈앞의 문장 한 줄보다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접해본 적이 언제였나”라는 소설 속 작가의 질문에 가만히 답을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