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식언(食言)

입력
2024.02.23 18:00
18면
"박용진도 공천 걱정 없는 당" 발언 소환
위성정당 금지·불체포특권 포기도 안 지켜
당이 신뢰 안 하는데 국민 지지 얻을 수 있나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천 잡음이 꽤나 시끌벅적하다. 보다 못한 민주당 원로들까지 "민주적 원칙과 객관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나섰을 정도다. 친명과 비명으로 당이 두 쪽 난 현실을 가장 걱정해야 할 이재명 대표의 인식은 남 일인 듯 평온하기 이를 데 없다. "혁신 공천은 말 그대로 가죽을 벗기는 아픈 과정"이라며 "(현역 하위평가 20%에) 제가 아끼는 분들도 많이 포함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본인 마음도 아프다는 취지의 이 대표 말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는 왜일까.

박용진 의원이 '의정평가 하위 10%'에 들었다는 소식은 2022년 8월 전당대회 당시 이 대표 발언을 소환했다. 강원지역 순회경선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당 운영을 위해 박용진 후보도 공천 걱정하지 않는 당을 확실하게 만들겠다"고 한 발언 말이다. '개딸'로 불리는 강성 당원을 등에 업은 이 대표가 당선될 경우, 총선에서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의원들에 대한 '공천 학살' 우려를 일축한 것이었다. 당원 앞에서 '통합'을 강조한 이 대표의 호언은 1년 반 만에 식언이 되고 말았다.

진보정당 출신인 박 의원은 2011년 민주당에 입당한 후 현안과 관련해 주류 입장만 대변하지 않고 합리적인 의견을 주장해 왔다. 2020년 총선 당시 서울 지역 민주당 당선자 41명 중 득표율 1위(64.45%)를 기록한 배경일 것이다. 박 의원처럼 의원평가 하위에 포함된 현역 다수는 비명계다. 반면 단수공천을 받은 현역 다수는 친명계다. '경선 시 감산'이란 핸디캡을 안은 비명계 의원들이 경선에서 맞붙어야 할 상대들은 대부분 친명계다. 정치인의 생사여탈이 달린 공천 심사 결과에 이 같은 '오비이락'이 반복됐다면 공정성에 대한 의심이 따르기 마련이다.

더 심각한 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린 경우다. 위성정당 창당과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가 대표적이다. 이 대표는 최근 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 의사를 밝히며 "위성정당 금지 입법에 노력했지만 여당 반대로 실패했다"며 "준위성정당을 창당하게 된 점을 사과드린다"고 했다. 굳이 '준위성정당'이라고 말한 것도 남우세스럽지만, 위성정당 출현을 막기 위한 별다른 노력 없이 총선 직전 비례대표 선출방식에 대한 득실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불체포특권 포기 역시 이 대표의 대선 공약이자 '김은경 혁신위' 1호 안건이었다. 지난해 9월 국회에서 두 번째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을 하루 앞두고 민주당 의원들에게 부결을 읍소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자신이 출범시킨 혁신위 권고를 걷어찼을 뿐 아니라 24일간의 단식 명분까지 군색하게 만들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정치는 신뢰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당내 경쟁자 제거, 의석 수 확보, 불체포특권 등 하나같이 이 대표의 이해와 직결된 사안에 말을 쉽게 바꾸는 모습이 신뢰를 얻기란 쉽지 않다. 거대 양당제에 기반한 우리나라의 총선은 지지층 결집뿐 아니라 중도층의 지지를 얻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를 역행하는 이 대표의 모습에 "총선 승리보다 자기 방탄을 위한 사당화에 관심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이 대표와 민주당의 공천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 국민들의 반응은 최근 국민의힘에 역전된 민주당 지지율이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대표는 공천 잡음을 통과의례와 같은 진통쯤으로 안일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국민들은 이 대표만이 아니라 정부 견제세력으로서 제1야당의 신뢰 문제로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김회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