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 성북동엔 영화 '똥파리'의 감독이자 현재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양익준 감독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빠뿅이라는 제목의 이 가게에는 해가 지면 배우나 연출가, 작가들이 모여 맥주나 위스키를 마시고 놀지만 가끔은 옛날 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설날 연휴 직전엔 여기서 존 카사베츠 감독의 ‘남편들’을 틀어준다고 인스타그램에 공지가 떴길래 아내와 함께 갔다. 나는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한 번 봤지만 아내와 다시 보고 싶어서 시간을 낸 것이다. 연휴 직전이라 그런지 가게엔 양 감독과 우리 커플, 그리고 프랑스 남성 관객 한 사람이 전부였다. 양 감독은 영화를 틀기 전 "이 영화는 1970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유레루'를 만든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영화 감각이 떨어지지 않도록 매년 이 영화를 다시 본다고 합니다"라며 영화를 선정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영화는 단짝이었던 네 명 중 한 명이 죽고 그 친구 장례식장에서 만난 세 명의 남자가 ”집으로 가지 않겠어!"라고 선언하고는 벌이는 일탈의 과정을 보여준다. 마흔 살 정도에 죽은 친구 때문에 인생에 화가 난 남편들은 길거리, 농구장, 수영장, 술집 등을 전전하며 놀다가 급기야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간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의식의 흐름처럼 자유롭고 때로는 과도하게 흘러가면서 묘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중년 남자들의 ‘소년스러움’이라는 면에서는 홍상수의 초기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문제는 영화가 여성을 너무 평면적으로 다루고 또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술집에서 가게에 있는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각자 노래하는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데 거기서 술집 여성들을 다루는 장면이 거의 폭군 수준이다. 런던에 가서 호텔을 잡은 뒤 카지노에 들어가 여성들을 헌팅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이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지만 여자들은 관대하게 웃거나 아무런 저항 없이 호텔방까지 따라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무리 1960년대 말이라지만 여성을 보는 시각이 이토록 ‘단순무식’했구나 하는 자각이 밀려왔다.
문득 몇 달 전 TV에서 방영해 주었던 ‘경마장 가는 길’ 볼 때가 떠올랐다. 1990년대 한국의 영화 신동 중 한 명이었던 장선우 감독의 이 영화는 문성근, 강수연 등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했고 명대사도 너무나 많았던(“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작품이었는데 다시 보니 여성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도를 넘고 있었다. 아니, 문성근의 대사는 거의 다 가부장적이고 비뚤어진 폭력의 정당화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예전에 그저 재밌게만 느꼈던 표현들이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다니. 이것은 그동안 내가 변하고 사회가 진보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야만의 시간’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불과 몇 년 전에 연기자 출신으로 정부 고위직에 올랐던 분이 후배 연기자에게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한다”라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길래 ‘저분 저러다 큰일 나겠네’ 생각한 적이 있다. 여자가 똑똑하면 칭찬해 줄 일이지 조심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때는 맞더라도 지금은 틀리는 게 너무 많다. 나이가 몇이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달라지는 건 받아들이고 또 배우자. 그게 ‘탈 꼰대’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