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작진이 중국 출신 여성 킬러 배역을 뽑는 오디션장. 액션 연기 포기 기로에 서 있던 배우는 절실했다. 오래 액션을 해왔지만 30대 중반이 되자 아기 엄마, 회사 팀장 등의 역할만 들어와 현실과의 타협을 고민하던 때였다. 오디션 대본 다섯 장 중 네 장이 액션, 나머지 한 장에 대사가 하나 있었다. 이 대사 하나라도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한국어를 완벽히 하는 원작 소설 속 캐릭터와 달리 중국어 발음이 배어있는 한국어를 구사했다. 결국 오디션에 합격했고, 그가 시도한 발음으로 캐릭터가 완성됐다.
지난달 공개된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 ‘킬러들의 쇼핑몰’에서 킬러 소민혜를 연기한 배우 금해나(37) 얘기다. 이 드라마가 4주간 한국 디즈니플러스 TV쇼 부문 1위를 차지하고 일본, 홍콩 등 아시아 5개국에서 톱 10에 진입하면서 금해나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됐다. “이런 여성 액션은 없었다” “멋진 배우를 발견했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를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금해나는 킬러들도 두려워하는 최상위 레벨의 킬러 역할을 맡았다. 주짓수 기술 등을 사용해 맨몸 격투를 하고, 각종 도구와 지형지물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혼자 근육질의 남성 킬러 20명과 싸운다. “금해나 액션 보는 것만으로도 드라마를 볼 가치가 있다” “일어나 박수를 쳤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금해나가 처음 액션을 택한 건 키 큰 여성 배우에 대한 제약 때문이었다. 키가 172cm인 그는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던 시절 “너는 여자 주인공 옆에는 절대 못 서겠다”는 선배들의 말에 큰 키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액션을 연습했고 이후 독립영화에서 액션 연기를 했다.
혼자 남성 킬러 20명과 대적하는 민혜 역할은 차원이 달랐다. 4개월 동안 액션스쿨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고, 집에서 수영장까지 4km를 뛰어가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나름의 ‘철인 3종 경기’를 하며 체력을 길렀다.
근육량이 3kg나 늘 만큼 고됐던 운동보다 힘든 건 외로움이었다. “운동하다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민혜 생각을 했어요. 죽을 고비 넘기를 반복하다 킬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너무 외로웠을 것 같았어요. 이 배역이 저한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도 자주 했고요.”
금해나는 중국인이라는 오해도 받았다. 억양과 리듬에 중국어 발음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데다 얼굴까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인인 걸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는 시청자도 있었다. 감쪽 같은 그의 발음은 독학한 것이다. “배우 탕웨이의 영상을 찾아보면서 차용했어요. 한국에서 오래 산 중국인 친구들이 말할 때의 혀 위치 같은 것들도 관찰했고요.”
중국어 3급 자격증도 땄다. 외국인을 연기할 때 언어를 공들여 배워 정확하게 구사해야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해나는 가수 지망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밴드 동아리를 하며 기획사 몇 곳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하나같이 "가수는 안 될 것 같으니 영화배우를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기획사에서 처음 연기를 접하고 “완전히 홀렸다”는 그는 열아홉 살에 극단 ‘골목길’에 들어갔다. 20대엔 자신이 없어서 연기를 포기할 결심을 몇 번이나 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연기를 못 끊겠더라고요. 그래서 서른 살에 정말 그만두려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어요. 멀리 도망가 보자, 했죠.”
호주로 떠나자 오히려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출국 1년 전에 찍은 단편영화 2편이 여러 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다. 영화제에 참석하려 치킨집에 일주일 휴가를 내고 귀국하는 길,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두고 쓴 작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5개월 남짓의 호주생활을 정리하고 배우로 돌아갔다. “그 후론 연기가 운명인가 싶었어요. 독립영화를 주로 찍으면서 작품 속에서 늘 짝사랑만 했는데, 멜로도 해보고 싶어요. 모든 액션 장르를 다 해보고 싶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