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개발로 본격적인 인공지능(AI) 시대를 연 오픈AI가 최근 '선거 프로그램 매니저'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냈다. 단순히 선거 관련 일을 했던 사람이나 정치학자를 뽑는다는 게 아니라 AI 엔지니어 직군에 속하면서 선거정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는다는 의미다. 오픈AI는 이 자리에 "기술적으로 복잡한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고, 글로벌 선거 관련 위험 완화를 위한 장기 전략 로드맵을 만들" 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AI 기술 개발과 인프라 구축을 주도해온 미국 빅테크(대형 기술기업)들의 채용 흐름이 달라졌다. 단순히 컴퓨터나 코딩만 잘하는 엔지니어를 뽑는 게 아니라 기술 이해도가 높으면서 이를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인재를 찾는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AI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AI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기업의 성장은 물론 생존까지 좌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거란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AI를 이용해 '세상에 없던 서비스'를 만들어내려는 경쟁이 시작되면서 AI 엔지니어 직군이 여러 갈래로 분화하고 있다.
다른 빅테크들 상황도 비슷하다. 애플 내부의 '머신러닝과 AI팀'은 최근 '테크니컬 라이터'(기술작가) 채용공고를 냈다. 이 자리의 지원 요건은 꽤 까다롭다. "영어, 컴퓨터과학, 데이터과학 또는 관련 분야의 학사 또는 대학원 학위"를 갖고 있으면서 "엔지니어나 연구원을 대상으로 한 최소 4년의 기술 저술 경험"이 있어야 한다. 기술 이해도가 높으면서 기술을 글로도 잘 표현하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원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애플은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면서 인간 행동을 연구해본 사람, 머신러닝 과학자면서 탄소 배출 감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채용한다는 공고도 최근 잇따라 냈다. 구글 역시 마찬가지다. AI 정책을 잘 알거나 사회과학을 공부한 엔지니어를 뽑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한국일보가 챗GPT가 세상에 나온 2022년 11월 30일 이후 올해 2월 7일까지 약 14개월간 오픈AI,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의 AI 관련 정규직 채용공고 725건을 전수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본보는 또 이들 기업이 공고한 직군을 글로벌 AI직무채용 플랫폼 'ai-jobs.net' 등 업계에서 통용되는 기준을 근거로 분류해봤다. 해당 기준에 따르면 생성형 AI 개발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직군은 26가지로 구분되는데, 오픈AI의 선거 프로그램 매니저나 애플의 테크니컬 라이터 등 최신 융합형 직군은 이와 별도인 '특이직군'으로 분류된다.
특이직군 채용이 많은 기업일수록 AI 응용을 고도화하거나 다른 분야에 적용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고 볼 수 있다. 분석 대상 미국 빅테크 4곳 중 특이직군 채용공고가 가장 많은 기업은 애플(90건)이었고, 오픈AI와 구글이 뒤를 이었다. 빅테크 4곳의 특이직군 채용공고를 합하면 총 139건이었고, 해당 특이직군들 종류는 56가지나 됐다. 글로벌 취업정보사이트 인디드(Indeed)에서 9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채용 플랫폼 기업 원티드랩의 이준 전사전략부문장은 "미국에서 생성형 AI 관련 채용이 지난해 상반기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며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첨단 기술이 등장한 뒤 일상화해온 과정들을 돌이켜보면 초기에는 기반 기술을 개발하고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업이 주로 수익을 얻으며 성장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술을 제대로 관리하고 다양하게 응용하는 기업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오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AI 역시 유사한 흐름을 따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글로벌 AI 업계와 학계에선 생성형 AI 모델의 개발 과정을 크게 △데이터 수집과 전처리(1단계) △모델 설계(2단계) △모델 구현과 훈련(3단계) △모델 평가와 조정(튜닝)의 4단계로 구분한다. 이렇게 개발을 마치고 나면 '제품 배포와 유지·보수' 단계가 이어진다. 오픈AI가 올 1월 낸 채용공고 62개의 약 37%는 유지·보수 단계에 분포했다. AI 신규 개발보다 품질관리에 좀더 중점을 두는 모드로 전환하면서, 한편으론 특이직군 채용으로 AI 활용의 다양성을 확대하려는 사업 전략일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구글은 이 비중이 약 39%로 더 높다.
MS는 여전히 1~4단계 채용공고가 많았다. 다만 신규 개발이 아닌 워드, 파워포인트 같은 업무용 소프트웨어에 AI 기술을 접목하는 '코파일럿' 솔루션 개발을 위한 엔지니어 수요(42건)가 두드러졌다. 업무용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자사의 강점을 AI 수익화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전략이 읽히는 대목이다. 이재성 중앙대 AI학과 교수는 "생성형 AI는 일반 대중이 대상이기 때문에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처럼 '1등 서비스'의 선점 효과가 매우 크다"면서 "경쟁 관계 기업들이 의도적으로 AI 수요를 늘리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챗GPT 출시 후 현재까지 AI 모델을 공개했거나 공개 예정이라고 알린 국내 기업 중 AI 관련 정규직 채용공고를 낸 곳은 네이버, 삼성, LG, LG유플러스, KT의 5곳이다. 최근 14개월간 이들 회사의 채용공고 수는 172건으로, 같은 기간 미국 기업 4곳(725건)의 5분의 1 수준으로 나타났다. 또한 미국 빅테크들 채용공고가 AI 모델 개발 전 단계에 걸쳐 분포하고 특히 특이직군 채용이 많은 것과 달리, 국내 기업들은 채용공고의 약 70%가 일부 직군에 편중됐고 특이직군으로 분류되는 채용은 4건에 그쳤다.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분석 대상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특이직군 채용공고를 낸 곳은 KT다. AI 시스템 설계 경력을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운항 최적화 기술과 융합하는 연구개발직을 4차례(4건) 뽑았다. 실제 KT는 AI와 5세대 이동통신(5G) 기술을 활용한 UAM 교통관리 시스템 실증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생성형 AI 모델 개발 1~4단계에 해당하는 14가지 직군에 대해 47건의 채용공고를 냈다. 22가지에 대해 183건을 낸 애플과 비교해 채용 직군의 종류와 공고 건수 모두 적었다.
국내 기업의 AI 엔지니어 채용 다양성이 부족한 것은 AI 산업 발전이 아직 고도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미국 빅테크 의존도를 낮추고, 다양한 전문인력에 대한 시장 수요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