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역병이 창궐해 어느 한 종류의 나무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면? 만약 그게 소나무라면, 사시사철 푸르렀던 산림 경관은 무엇으로 대체될까? 애국가 2절 첫 소절에 등장하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후대에 어떠한 상징으로 전해질까? 다소 황당한 공상으로 여겨질 이 가정들은 놀랍게도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소나무재선충병이 경주와 포항, 안동, 밀양 등 남부권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한번 걸리면 사실상 치료가 불가능해 ‘소나무 에이즈’로도 불리는 소나무재선충병은 솔수염하늘소와 북방수염하늘소를 매개로 퍼져나간다. 전파된 재선충은 기주인 소나무류의 수분과 양분이 이동하는 통로를 막아 시듦병을 유발하고 2~3개월 안에 감염목을 고사시킨다. 고사율은 100%에 근접한다. 우리나라보다 앞서 소나무재선충병 피해를 당한 일본은 일부 문화재 구역을 제외하곤 전 국토에서 소나무가 자취를 감췄다.
지난 1월 산림청은 소나무재선충병이 집단 발병해 관리가 필요한 6개 시군(대구, 성주, 고령, 안동, 포항, 밀양) 4만483ha를 특별방제구역으로 지정했다. 본보가 지난 7일부터 8일까지 이틀에 걸쳐 경북 동해안 31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며 소나무재선충병 ‘감염 벨트’를 확인했다. 현장 상황은 보도자료에 쓰인 수치나 수식을 크게 상회했다. 희끗희끗 갈변이 시작된 개체부터 단풍을 맞은 듯 완전히 누렇게 사색으로 물든 개체 그리고 완전히 잎을 모두 떨군 채 고사한 개체까지 시선이 닿는 소나무마다 병해가 관찰됐다. 오히려 성한 나무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확산세는 심각했다.
현장에 동행한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피해 개체 수와 면적을 제대로 조사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재선충병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면서 “인력으로 방제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서 위원은 “소나무재선충병 피해 지역을 보면 산불이 지나간 자리와 닮았다”라며 “산불은 하루 이틀 만에 산을 태우지만, 재선충은 한 해 두 해에 걸쳐 서서히 산을 태운다”고 설명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나무들이 한꺼번에 병에 걸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걸 목격하고 있다. 이 나무들이 아프다는 걸 우리는 최근에야 알았다.” 포항 남구 호미곶면 대동배리 해안가에서 만난 주민 정찬관(71)씨는 황적색으로 변한 곰솔(해송)을 바라보며 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미곶 토박이인 정씨는 “말라죽은 소나무가 늘어나면서 마을 경관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아무 대책도 없이 결국 나무들이 다 사라진다는 현실에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말했다.
엄태원 숲생태복원연구소 소장은 소나무류 점유율이 높은 국내 산림생태의 특이성을 소나무재선충병 대유행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엄 소장은 “생태학적으로 소나무류가 지나치게 높은 밀도로 분포하면 자연히 이를 먹이자원으로 삼는 재선충이 쉽게 활성화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살아서 움직이는 매개 곤충인 솔수염하늘소를 선택적으로 죽이거나 이동을 막을 방법 같은 건 애당초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단지(재선충병 발생지역과 그 외곽의 확산 우려지역)만이라도 소나무 밀도를 조정해 활엽수 혼효림으로 유도하는 등 산림의 종 다양성을 높여 건강한 숲으로 가꾸는 것이 느리지만 지속 가능한 대응책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