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상담 업무 지원에 챗봇을 활성화하겠다'는 지침이 내려왔어요. 제가 고객과 상담한 음성을 인공지능이 문자로 변환하는데, 당시엔 제 이름 세 글자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어요. 전화 상담 업무와 별도로 챗봇이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거나, 고객 요구를 잘못 인지한 부분을 일일이 수정하는 작업을 1년 정도 진행한 것 같아요. 얼마 뒤 은행에서 고객 상담 서비스에 챗봇을 도입했어요. 고객이 '인터넷 뱅킹에서 계좌 이체 한도 증액은 어디서 해?'라고 물어보면 챗봇이 대답했죠. 그동안 상담원이 직접 알려주던 내용을 이젠 챗봇이 안내하게 된 거예요. 이러다 내 일이 챗봇에 대체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현진아(43·여)씨는 하나은행 콜센터 업무를 하는 용역회사 소속 상담원이다. 콜센터 상담원 경력 10년 차인 현씨의 일자리는 최근 인공지능(AI)에 의해 조금씩 잠식당해 왔다.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의 AI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로 세상이 떠들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융권이 챗봇 상담 등 AI 서비스를 앞다퉈 도입하던 시기부터였다. 당시에도 콜센터 상담원이 제일 먼저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작 현씨와 동료 상담원들은 '고객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사람 상담원뿐'이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새 현씨는 전화 상담 업무가 끝난 뒤 챗봇의 오답변을 수정하고 있었고, 고객들은 자신이 아닌 챗봇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콜 건수 하나하나가 임금과 직결되는 상담 노동자에게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다.
실제 챗봇 때문에 콜센터 상담원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건 지난해 11월 말이다. KB국민은행이 6개 콜센터 용역회사 중 2곳과 도급계약을 해지하면서다. 그 두 회사에 소속돼 있던 상담사 240명은 사측으로부터 '고객센터 사업장 폐쇄에 따른 해고 예고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KB국민은행 측은 "코로나19 완화 이후 대면 상담 수요가 회복되고 AI 서비스 고도화 등의 영향으로 고객센터로 들어오는 콜 수가 2년 새 26% 감소해 협력업체 수를 불가피하게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또 "같은 기간 챗봇 상담 건수는 200% 이상 증가했다"고 덧붙였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집단 해고 위기에 처한 이면에 'AI의 침투'가 있었던 셈이다.
KB국민은행의 설명처럼 AI 기술이 고도화한 측면도 없지는 않다. 기계가 사람이 말하는 '자연어'를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다. 여러 고객센터가 채택하고 있는 STT(Speech To Text·음성 문자 변환)·TA(Text Analytics·상담 분석) 시스템은 자연어 이해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상담 전화 녹음을 텍스트로 변환해 빅데이터로 구축하고 고객의 수요를 보다 정확하게 분석, 상담원의 상담 내용을 지원하고 상담 품질도 제고할 수 있다는 게 기업의 논리다.
그러나 정작 스마트폰 대중화, 비대면 금융 확대 등으로 금융권 고객 상담의 난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상담 노동자들은 주장한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데도 경영 논리에 의해, 고객 편의와 상관없이 무턱대고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18년째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해온 국민은행 콜센터 소속 김현주(46·여)씨는 "2010년대 중반부터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인터넷 뱅킹으로 적금 가입, 계좌 개설, 기업 거래 등 사실상 영업점에서 하는 모든 업무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간단했던 상담 업무의 종류도 분화했고, 상담 내용도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현씨는 "80대 어르신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뱅킹을 이용하고 싶어 해서 컴퓨터로 공인인증서 발급받는 것부터 안내해드린 적도 있다. 상담 한 번 하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씨가 속한 콜센터 용역회사는 상담원들의 통화 내용을 평가하는 상담품질평가(일명 'QA 평가')에도 AI 기술을 도입했다. 기존에는 관리자가 상담원의 여러 통화 녹음 중 일부 표본만 발췌해 듣고, 이를 평가해 임금과 연동하는 방식이었다. AI는 사람 관리자보다 더 많은 표본을 들을 수 있는 데다, 평가 지표만 주어지면 평가 과정도 자동화할 수 있다. 상담원뿐만 아니라 관리자의 업무까지 위협하는 셈이다. 실제 콜센터 AI 자동화 솔루션을 판매하고 있는 A기업에 따르면, 카드사·보험사·대부업체 등 다수 기업들이 QA 평가에 AI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A기업은 "전체 콜 데이터 100%를 전수조사할 수 있고 자동 상담 평가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일관된 평가 기준을 일괄 적용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김씨는 "QA 평가는 내가 몇 퍼센트로 부드러운 화법(일명 '요죠체')을 쓰는지, 고객의 말을 끊지는 않았는지, 인사를 잘했는지, 잘못된 상담은 없었는지 등을 평가하는 것"이라면서 "사람한테는 100점을 맞은 상담 내용이 AI 평가에서는 저평가를 받는 사례가 나온다. AI가 평가한다고 해서 객관성이 더 담보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콜센터에 AI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항변한다. 어떤 산업이든 비대면·디지털화가 진행 중이고, 특히 금융권은 거대한 빅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보다 더 개인화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내세운 논리의 이면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10년간 콜센터 노동현장을 연구한 결과를 담아 '사람입니다, 고객님'을 쓴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콜센터에 AI를 도입하는 것이 결국은 인건비 축소 및 경영 효율화를 목적으로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김 교수는 "인력 축소를 보다 합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빅데이터를 활용해 객관적인 평가지표를 만드는 것"이라면서 "AI는 기업들이 인원을 감축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면죄부로 활용하기 좋은 수단"이라고 꼬집었다.
이재성 중앙대 AI학과 교수도 "콜센터는 노동집약적으로 인건비가 많이 드는 데다 이윤은 창출하지 못해 어떤 기업이든 없애고 싶어 하는 조직"이라며 "이 때문에 AI 기업 입장에서도 콜센터를 보유한 기업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보급하기 좋고, 시장을 확대할 가능성도 높다"고 짚었다.
"고객이 질병에 대한 보험 처리 상담을 할 때, 상담원이 단순히 '이런 서류가 필요하다'라고만 말하는 건 아니에요. '골절상을 입으셨군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와 같은 공감 표현을 반드시 해야 하고, 상담 품질 평가에서도 중요한 기준이 되죠. 게다가 한 명의 고객이 여러 보험상품을 가입했거나, 계약 당사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경우도 많아 상담이 꽤 까다로워요. 그런데 과연 AI가 이런 역할까지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요. 고객들이 얼마나 만족할 수 있을까요."
현대해상 고객센터 소속 상담원인 김주현(43·여)씨는 콜센터 상담원을 비전문직으로 보는 인식이 AI에 의한 대체를 앞당길 수 있다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는 금융상품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야 업무가 가능한데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보는 시선 때문에 'AI가 대체해도 괜찮은 노동'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다. 현씨 역시 "콜센터에 여성 직원들이 많은 건 그나마 다른 직업에 비해 정시에 출퇴근이 가능하고 공휴일 근무가 없는 일자리라 일-가정 양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일자리가 AI에 의해 사라진다면 과거 공장의 여공들이 필요할 때는 채용됐다가 기계로 대체됐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라며 씁쓸함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