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이 자체 AI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위해 최대 7조 달러(약 9,300조 원) 규모의 투자 유치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면서 반도체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지난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전체 매출액(약 5,270억 달러)의 10배를 웃도는 올트먼의 이 구상이 실현되면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우리 기업에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도 관련 규제 점검, 인력 양성 등 정부의 촘촘한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13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에 따르면 올트먼은 자체 AI 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위해 5조∼7조 달러의 자본 조달을 목표로 아랍에미리트(UAE)의 셰이크 타흐눈 빈 자예드 국가안보 고문 등 예비 투자자와 접촉 중이다.
올트먼이 나선 건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의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 경쟁하는 인텔, AMD와는 달리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은 엔비디아가 80% 이상을 점유하는 독점 구조다. 단순 계산을 대규모로 처리해 답을 내는 생성형 AI 특성상 병렬 연산에 안성맞춤인 GPU가 필요한데 엔비디아가 글로벌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최신형 반도체 H100는 주문 뒤 40주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빅테크 업체들로서는 이런 병목 현상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AI 반도체를 준비 중이다. 구글은 2017년 텐서처리장치(TPU)를 내놓고, AI 챗봇 '바드' 개발에 수만 개 TPU를 사용했다. 최근 최신 칩(TPUv5p)을 자사 대규모언어모델(LLM) '제미나이'에 적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해 11월 자체 생산한 AI 반도체 GPU '마이아 100', CPU '코발트 100'을 공개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도 지난해 11월 자체 AI 반도체 '그래비톤4'와 '트레이니움2'를 선보였고 메타도 자체 개발한 AI 반도체를 올해 데이터센터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올트먼의 움직임도 같은 맥락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인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빅테크 업체들이 자체 반도체를 생산하려는 건 (주문형이 아닌) 대량생산된 반도체를 생성형 AI 연구 개발에 썼을 때 '반도체 개수' 이상의 차별화를 이루기 어려운 데다 공급 부족으로 이마저 제때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 본토에서 오픈AI가 직접 이 모든 계획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WSJ는 올트먼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들이 수두룩해 계획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인 전문가들이 많다고 보도했다. 올트먼은 수년 안에 반도체 제조시설 10여 개를 짓고 대만 TSMC에 운영을 맡기겠다는 계산이다. 설계는 직접, 양산은 외부 손을 빌리겠다는 건데 첨단 시스템 반도체 양산이 가능한 건 TSMC와 삼성전자, 인텔 정도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올트먼이 만들 'AI 반도체 생태계', 빅테크 업체들이 생산하는 자체 AI 반도체 공급망에 우리 기업이 참여한다면 성장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 먼저 파운드리 분야에서 세계 1위 TSMC와의 격차를 좁힐 수 있다는 기대다.
박 교수는 "외신에서는 오픈AI의 파운드리 업체로 TSMC만 언급되지만 계획대로라면 한 개 업체가 모두 맡기 어려워 삼성전자에도 기회"라고 말했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올트먼이 TSMC와 손잡으면 삼성전자와 TSMC의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면서도 "TSMC 외에 추가로 파운드리 업체와 협약을 맺으면 인텔보다는 기술 수준이 높은 삼성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히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우리 기업이 전체 시장의 90%를 차지한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에 HBM3(4세대)를 독점 공급 중인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 HBM3E(5세대) 양산을 시작한다. 삼성전자도 상반기에 HBM3E 양산 준비를 완료할 예정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AI 반도체 구동을 위해 필요한 HBM은 최근 주문형 생산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며 "(이 흐름이 이어지면)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문형 반도체는 생산량을 예상할 수 있고 부가가치가 높아 안정적 성장이 가능하다. 이 교수도 "(AI 반도체가 뜨면서) 파운드리 산업처럼 메모리 산업의 부가가치도 높아지고 있고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엔비디아 등 AI 수혜를 제대로 입은 기업에 비해 부가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꼽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엔비디아의 수익은 크게 는 반면 HBM을 생산하는 국내 메모리 기업은 그렇지 못하다"며 "엔비디아가 HBM을 비교적 싼 값으로 구매한 후 이를 GPU와 결합해 비싸게 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기업의 강점인 메모리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제품을 개발하고 해외 업체가 채택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인력 양성을 지원하는 등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용수‧전력 공급,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 등 정부 지원 방안도 서둘러야 한다. 이 교수는 "반도체전공 정원의 두 배 넘는 학생들이 부전공‧복수전공을 하지만 가르칠 사람이 없어 수업 정원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대학 정원 조정이 어렵다면 복수전공자만큼 교원을 더 충원하는 방식이라도 반도체 교수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