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몸값 90억, 청산가리 과자…제과대기업 흔든 소년 목소리

입력
2024.02.23 04:30
15면
<74> 일본 '글리코·모리나가' 제과업체 협박 사건
일 제과업체·언론사·경찰에 보낸 협박장만 140통
아이·여성 목소리 녹음해 협박… 수사 지휘관 자살
청산가리 든 과자 전국에 배포, 일본 사회 공포로
용의자 '여우 눈의 남자'는 북한 공작원? 낭설 난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메이신고속도로를 시속 85㎞로 달려 스이타서비스(일종의 휴게소)로 와라. 게이한레스토랑 왼쪽에 있는 담배 자판기 위에 편지가 있다. 편지에 적힌 대로 행동하라.
일본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에 이용된 협박 테이프 내용

1984년 4월 24일, 일본 대형 제과 업체 에자키글리코의 한 감사임원 집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딸깍' 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말을 시작했다. 이 임원은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여성은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전한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수상히 여긴 임원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30대 여성 목소리로 녹음해 둔 테이프를 통화 시작 직후 재생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녹음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30대 여성이 아니라 중학생 나이인 10대 여성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본 사회에선 누구 말이 맞는지, 대체 왜 이런 전화가 걸려 왔는지 등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협박 테이프 전화'를 받은 건 글리코 임원만이 아니었다. 1985년 8월까지 대형 식품·제과 회사들엔 이런 전화가 줄을 이었다. 같은 해 11월 14일 하우스식품에 걸려 온 협박 테이프 전화에는 10세 미만인 듯한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녹음돼 있기도 했다.

아이부터 10대 학생, 30대 여성까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여러 명이 동원된 협박 테이프. '어린이나 여성을 납치해 녹음했다'는 주장은 물론, '범행에 가담한 범죄조직의 일원이 직접 녹음했다'거나 '지나가는 아이·여성에게 녹음을 부탁했다'는 가설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녹음에 동원된 사람이 누구이며,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사는지 등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다.

에자키 사장 전라 납치 사건으로 시작

이는 1984년 3월부터 1985년 8월까지 벌어진 일본 최대의 미제 사건, 이른바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의 일부다. 일본 대형 제과 기업 '에자키글리코'와 '모리나가제과'의 사명을 따 명명됐는데, 두 회사 외에도 수많은 식품·제과 업체가 협박을 받았다. 일본 전역이 무대가 됐고, 연루된 사건 수만 28개에 이른다. 2011년 일본 공영 NHK방송이 각종 미제 사건을 취재·분석해 드라마 형태로 각색한 'NHK 스페셜 미해결 사건' 1편으로 다룰 정도로, 일본인들이 지금도 가장 궁금해하는 미제 사건으로 꼽힌다. 2020년 10월엔 이 사건을 토대로 각색해 만든 영화 '죄의 목소리'가 개봉해 인기를 끌었다.

최근 들어 이 사건이 다시 회자된 건 2022년 3월. 당시 글리코 사장이 에자키 가츠히사에서 그의 장남 에츠로로 교체됐는데, 일본 언론들은 이를 보도하면서 에자키 전 사장을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의 피해자'라고 설명했다. 바로 그가 미스터리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은 1984년 3월 18일 밤 9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근 후 자녀들과 목욕을 즐기며 평화로운 밤을 보내고 있던 에자키 사장. 이때 복면을 쓴 괴한 남성 3명이 총을 든 채 그의 집에 침입했다. 에자키 사장은 전라 상태로 괴한들에 의해 납치됐고, 아내는 두 손이 묶인 채 화장실에 감금됐다.

이튿날 새벽 1시쯤 글리코 이사 집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지정한 장소에 현금 10억 엔(약 89억3,000만 원)과 금괴 100㎏을 갖다 놓으라며 에자키 사장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 편지였다. 경찰은 편지에 적힌 곳에 현금 다발과 금괴를 두고 잠복했으나, 범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괴한들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높이 10m, 무게 130㎏에 달하는 현금과 100㎏짜리 금괴를 3명이 운반하는 건 불가능해서다.

그런데 납치 사흘 만인 3월 21일, 에자키 사장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오사카 이바라키시의 신칸센(고속열차) 차량기지 근처 수방 창고에 갇혀 있다 빠져나온 그는 강을 따라 도망치다 오사카화물터미널역에 몸을 숨겼고, 철도회사 직원들에 의해 경찰에 무사히 신병이 인계됐다.

금품 협박만 하고 돈 챙기러 나타나지 않은 범인들

범인 행방은 묘연했지만, 그래도 에자키 사장의 탈출로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 이후부터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범인들은 당시 인기를 끈 일본 추리소설 '소년탐정단'에 등장하는 '괴인 22 면상'에서 따 왔다며 '괴인 21 면상'이라는 조직명을 공개했고, 협박 대상을 늘려 가며 본격적 활동에 나섰다. 경찰은 '사건 진행 경과를 볼 때, 범행 가담 인원이 7명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그해 4월 2일, 에자키 사장 집에는 또다시 협박 편지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6,000만 엔(약 5억3,600만 원)을 요구했고, 20일 뒤에는 글리코 감사임원 집에도 '1억2,000만 엔(약 10억7,000만 원)을 내놓으라'는 협박장이 도착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범인들은 돈을 받기로 한 장소에 또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서 끝나지도 않았다. 범인들은 4월 8일 마이니치신문, 산케이신문을 시작으로 일본 언론사들에 협박장을 보냈고, 같은 달 10일엔 글리코 본사 방화 사건도 발생했다. 게다가 모리나가, 마루다이식품, 하우스식품, 후지야 등 일본의 다른 대형 식품·제과 업체들에도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이 사건은 급기야 아이들 생명을 위협하는 양상으로까지 번지며 일본인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범인들은 같은 해 5월 10일 요미우리·아사히·마이니치·산케이신문 등 유력 신문사 4곳에 '효고현 슈퍼마켓에 진열된 글리코 과자에 청산가리를 탔다' '글리코(의 과자)를 먹고 묘지로 가자' 등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범행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도 경고했다. 어느 슈퍼마켓, 어떤 과자에 청산가리를 넣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효고현 슈퍼마켓·편의점에 진열된 글리코 제품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글리코는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수조 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청산가리 과자 협박'의 다음 표적은 모리나가였다. 지역을 확대하겠다는 범인들 예고대로 그해 10월에는 교토, 오사카, 고베, 나고야에서도 청산가리가 든 모리나가 제품이 발견됐다. 당시 경찰에도 '바보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보'라고 적은 편지를 보내 수사 난항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금품 요구와 독극물이 든 과자 배포 협박을 반복하며 범행을 이어간 지 1년 6개월이 흐른 1985년 8월 12일, 범인들은 '이제 회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마지막 협박장을 보냈다. 스스로 범행 종결을 선언한 것이다. 닷새 전인 8월 7일 야마모토 쇼지 시가현 경찰본부 부장이 범인 추적 실패를 책임지겠다며 사임한 뒤 자살한 사실이 그 이유라고 밝혔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에 북한 개입설도 제기

범인들이 제과 업체, 언론사, 경찰에 보낸 협박장만 총 140통. 수사에 동원된 경찰은 130만 명, 수사 대상자도 12만5,000명에 달했으나 사건 실체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공소시효는 2000년 2월 12일 만료됐다. 범인의 외양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딱 하나, 1985년 1월 경찰이 공개한 한 명의 몽타주뿐이었다. 폐쇄회로(CC)TV에 포착된 '가늘고 길게 올라간 눈매'를 표현한 몽타주가 공개되자 용의자는 '여우 눈의 남자'로 불렸다. 이 용의자가 1985년 2월 도쿄와 나고야시의 한 편의점을 배회하는 듯한 수상한 모습이 포착됐는데, 해당 편의점에선 실제로 청산가리가 든 과자가 나오기도 했다.

'여우 눈의 남자'의 정체를 둘러싼 소문은 무성했다. 북한 공작원부터 좌익 단체 조직원, 조직폭력배 일원, 전·현직 경찰관 등이 거론됐다. '북한 공작원설'은 당시 일본 사회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탓에 '북한이 이를 은폐하려고 저지른 사건'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모두 근거가 부족한 낭설에 불과했다.

30여 년이 지난 뒤, 반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수사의 일관성이 흔들린 탓에 진상 규명에 실패했다'는 견해였다. 효고현경찰청 사건 담당 형사였던 야마시타 세이시는 2022년 3월 일본 주간 슈칸분슌 기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형사들 사이에선 '인사이동 전 사건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초동수사를 지휘한 간부가 바로 교체되면 인수인계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수사 방침도 흔들린다.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이 전형적으로 그랬다."






류호 기자